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민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남한에 가서 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할 남성은 북한에서는 대학생이었는데 남한에 가서 용접공이 됐습니다. 일한만큼 수입에 따라줘서 전혀 생활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요. 함경북도 함흥 출신의 김명일 (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명일: 체제의 변화가 좀 있을까 기대를 했는데 변하는 것이 없어서 앞으로도 이 사회에 더 이상 희망이 없겠다고 생각하고 2012년에 탈북하게 됐습니다.
김 씨는 김정일 사망 이후 세상이 좀 변할까 기대를 했지만 3대 세습이 이뤄지는 모습을 보고는 바로 탈북을 결행합니다. 그리고는 중국을 거쳐 남한땅을 밟게 됩니다. 모든 것이 국가 계획에 따라 지어진 반듯한 북한의 건물만 보다가 남쪽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김명일: 남한에는 오니까 건물이 여기저기 선게 조잡해보이는 느낌도 있고 그랬어요. 남한에 대한 기대감이 컷는데 건물 구조를 볼 때 약간 실망했어요. 하나원을 나오기 전인데 첫 느낌은 그랬어요.
기자: 그 다음 지역사회에 집 배정 받고 나온 후에는 생각이 바뀌던가요?
김명일: 네, 그 다음에는 확실히 바뀌더라고요. 어떻게 바뀌었나 하면 우선 복지가 잘 돼 있고 모든 시스템이 잘 돼있다고 생각됐어요. 누구나 열심히만 일하면 북한처럼 먹을 것이 없어 허덕이고 또 그 어떤 압박이나 이런 것도 없고 자기만 열심히 하면 모든 게 스스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그런 것이 보이더라고요.
겉모습만 보고 잠시 실망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남한사회가 약자를 보살피면서 더불어 사는 사회란 것을 알게 되니 생각이 달라진 겁니다.
김명일: 그것이 첫째 우리가 하나원을 나오면 정착금을 주고 남한사회를 알아가라고 정부가 6개월 동안 한달에 48만원인가 주는 것이 있어요. 북한에서는 그런 것이 없잖아요. 열심히 일해도 돈도 안주고 오히려 세금을 내라고 하는 것이 북한당국인데 우리 고생 많았다고 집도 주고 돈을 주고 할 이유가 없는데 우리가 정착할 수 있게 한국사회를 하나하나 알아가라고 돈도 주고 집도 마련해주고 하는 것이 너무 고마운 거죠. 탈북민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반 취약계층 주민들에게도 이런 혜택을 다 주는 것이 진짜 서민들을 위한 체계가 잘 돼있다 .
김 씨는 남한생활 5년이 지난 지금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학생이었던 그가 남한에서도 계속 공부를 해서 대학 졸업을 하지 않았을까? 기자는 생각했지만 김 씨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김명일: 처음에는 대학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그것보다 과연 한국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무엇인지 탐문을 해봤어요. 밑바닥부터 올라와 보자 해서 조선소 가서 일을 했어요. 거기서 보온 하는 일을 했는데 실제 별개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거긴 돈을 엄청 많이 줘요. 내가 일한만큼 그에 대한 보수를 주니까 그게 또 행복한 거예요. 재미있고요.
뭔가 자신이 선택을 하고 또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김명일: 1년동안 여기 저기 교육훈련을 받으면서 알았어요. 문화 차이도 있고 기초교육 수준이 높더라고요. 여기는 어려서부터 고등교육이 잘 돼있어서 따라가기가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을 포기했죠. 공부를 하고 자격증이 있어야만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도 대학졸업하고 취업을 못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학력이 중요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문 기술을 배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대학을 포기 했던 것이죠. 20대에 왔으면 대학공부를 선택했을 텐데 그게 아니니까 대학을 포기했죠.
기자: 그래서 어떤 기술을 배우셨나요?
김명일: 저는 용접을 하고 있어요.
김명일 씨가 용접이라는 직업을 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 씨는 쉬운 길보다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에 대한 대가가 있는 일을 택한 겁니다.
김명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라고요. 모든 일은 자기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까 어려웠죠. 내가 수고한 것이 비해 조금더 보수가 높은 일을 봤는데 직종을 보니까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 용접이더라고요. 그래서 용접에 도전을 해보자 하고 6개월 용접학원을 마치고 지금 용접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전문 기술을 가진 노동은 자신만 열심히 하면 돈벌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김명일: 우리 탈북민들이 하는 소리가 초심을 잃지말자. 우리가 저기서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살아왔는데 이런 것 하나 우리가 극복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 같아요. 용접은 굴착기나 여러 기계설비를 재보수 하거나 선박 수리 주문 들어오면 거기 가서 일을 해주고 있어요. 16만원정도 받으면서 일하고 있죠.
용접공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김명일 씨. 그는 현재 그는 그가 하는 일이 만족하고 있을까요?
김명일: 용접이 객관적으로 볼 때는 험하고 위험한 것같은데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하다보면 요령도 생기고 나중에 돈 벌어서 다른 사업도 할 수 있고 하니까 전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은 이렇습니다.
김명일: 아침 8시 반에 시작해서 저녁 6시까지 해요. 일이 빨리 끝나면 빨리 퇴근할 때도 있고요. 일정하게 시간이 정해진게 아니고요. 회사 생활이 아니고 주문을 받고 일을 하기 때문에요.
기자: 위험하지는 않나요?
김명일: 어떤 때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일할때도 있고 하니까 위험은 한데 그런일은 더 보수가 높아요.
기자: 하는 일이 적성에 맞고 할만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김명일: 적성에는 안 맞는데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다른 일을 해야죠. 그런데 어떻게 제 좋은 일만 하고 삽니까?
이젠 입소문이 나고 해서 김 씨를 찾는 사람도 많다고 하네요.
김명일: 주변 동료도 있고 같이 일감도 찾고 하니까 괜찮아요. 업체에서도 인정을 하면 업체에서 고정적으로 쓰려고 하거든요. 일을 잘한다고 소문이 돌면 기술자가 딸리니까 계속 오라고 하고 해서 이제는 만원이라도 돈을 더 주는 쪽으로 가는 것죠.
기자: 몇 년 일하신 거죠?
김명일: 3년 8개월 정도 됐습니다. 왠만한 것은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됐습니다.
열심히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김명일 씨. 특별할 것은 없지만 소중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김명일: 일할 때는 열심히 하고 또 여가 시간에는 등산도 좀 다니고 하는데 제가 다리가 좀 안좋아서 등산은 잘 안하고 공원 산책을 하거나 거래요. 그런데 전 대체로 집에서 쉬는 게 제일 좋아요. 다니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함흥 출신의 김명일 (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