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 이 세 가지를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누구나 남보다 잘살고 싶어하고 이름도 세상에 떨치며 살았으면 하고 바랄 수 있죠.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탈북여성 이영미 씨는 자신의 처지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행복이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이영미 씨의 이야기입니다.
청진이 고향인 이영미(31 가명) 씨는 1998년 탈북했습니다. 중국에서의 생활을 거쳐 이제 남한 생활이 건 10년이 되어 가는데 이 씨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부터 들어봅니다.
이영미: 저희 집은 엄마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많이 아프셨습니다. 저는 그때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에 있었는데 장녀로 책임감이 느껴졌습니다. 내가 집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저희 집은 또 과일이 많이 나는 곳이었는데 국경연선에 가면 돈으로 바꿀 수 있고 먹을 것과 바꿀 수 있다는 얘길 듣고 갔는데 그쪽에서 하는 말이 중국에 건너가 한 달만 벌면 1년을 먹고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너무 귀가 솔깃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9세였습니다. 내가 한 달만 고생하면 엄마가 1년 동안 편안할 수 있겠구나…
보통 남한에 간 탈북자가 경험하는 과정을 이 씨도 그대로 답습합니다. 공안에게 붙잡혀 강제북송을 당하고 다시 재탈북해 남한으로 갈 수밖에 없는 아픈 기억입니다.
이영미: 어느 순간에는 또 잡혀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밤에 잠이 잘 안 왔습니다. 자다가도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깨고 경찰차만 봐도 무섭고 머리카락이 서고 했습니다. 그때 당시는 다시 잡혀가면 자살해야지 그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에 가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잡혀갔을 당시 부모님이 너무 아파했습니다. 북한에서 8월28일이 청년절인데 27일 집에 들어갔습니다. 운동장 바로 뒤에 집이 있는데 학교에서 청년들이 춤추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감방에서 빈대한테 물려서 형편없이 돼서 집에 들어갔었죠. 소위 말하는 꽃제비 같은 모습이라고 할까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엄마가 막 우셨습니다. 네가 왜 이렇게 돼서 왔니 하는 말을 들으니 부모에게는 못할 짓인 것 같고…
이 씨는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탈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중국에 있는 한 살된 아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중국에서 3년 동안 먹는 것 걱정 없이 흰 쌀밥을 먹다가 다시 끼니 걱정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도 했습니다. 조선족 남편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신분문제는 풀리지 않았고 결국 남한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풍에 돛을 단 듯 새로운 인생이 펼쳐집니다.
이영미: 저는 한국에서 살면서 매일 감사하며 삽니다. 우선은 우리 부모님에게 건강하게 낳아줘서 감사하고 여기 다니면서 보니까 너무 못사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분들을 만날 때면 나같은 탈북자는 임대주택에서 사는데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고요. 그래서 내가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기자: 한국 정부는 왜 탈북자에게 혜택을 준다고 생각하세요?
이영미: 제가 강의를 들었는데 거기에서 탈북자들은 한나라 한민족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국에서 어려움 없이 첫발을 내 뛸 때 불편함 없이 살라고 임대주택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씨는 중국에서 조선족 남편도 데려와 남한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사이 둘째와 셋째도 낳았고 이제는 정부에서 받은 임대아파트가 작게 느껴질 정도가 됐습니다. 사람이 몸이 편해지면 또 새로운 근심거리가 생긴다고들 하는데요. 남한생활에서 느끼는 고충에 대해서도 들어봅니다.
이영미: 저는 힘들거나 그런 것보다는 외로웠습니다. 어떤 느낌이냐 하면 난 국제고아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친정 엄마도 없고 저는 또 국제결혼(조선족)을 해서 시집 식구도 없어서 다른 집에서 식구들이 나들이를 가는 모습을 보면 왠지 외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애들이 둘째랑 셋째는 아직 어리니까 모르는데 첫째는 친구집에 다녀와서 외할머니가 뭐야라고 묻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해줬습니다.
왜 새로운 사회에서 힘든 일이 없겠습니까? 좀 더 큰집으로 이사했으면 또 아이들 과외 공부시키자면 돈도 더 있어야 하고 좋은 옷도 입고 싶고…하지만 이 씨가 말한 것처럼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부족한 것도 불편한 것도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남을 위한 봉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영미: 최근에 시작했는데 정착 도우미라고 탈북자가 오면 길도 알려주고 지하철은 어떻게 타는지 시장에서 물건은 어떻게 사는지 알려주고 살면서 어려움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도와주는 일입니다. 저도 처음에 여기 와서 많이 경험했으니까요.
오전에 아이 셋을 학교 보내고 남편 출근시키고 나면 동네 복지관 시설에 가서 탈북 도우미로 일합니다. 게다가 올해 들어간 대학 공부는 과제물을 미루다가는 학과 공부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정말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지만 주말에는 또 지역 복지관에 나가 봉사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 그것은 내가 맘먹기에 달린 것 같습니다. 내가 받았으니까 베풀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남들 보기엔 위선을 떤다고 할지 몰라도 내가 받았으니까 지금 건강할 때 하나라도 남을 도와줘야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나중에 내 자식들이 내가 남을 도우면서 사는 것을 보면 애들도 그렇게 살 것이라고 믿고 하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오늘도 도시락 배달을 했는데 그러면 할머니들이 도시락을 받고 좋아하는 상상을 하면 너무 좋습니다. 나누는 기쁨이 나에게는 두 배로 돼서 돌아옵니다. 저는 항상 도시락을 들고 뜁니다. 그것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을 생각해서요. 그러면 할머니들이 너무 반가워하고 그러 때 느끼는 기쁨은 뭐라고 말하기 힘들죠.
이 씨가 뒤늦게 신학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것도 훗날을 기약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고향에 가서 가장 보람있는 일을 하기 위해 남한의 복지 체제를 알아야 한다는 건데요. 이 씨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직접 들어보죠.
이영미: 크게 바라지는 않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복지사로 일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대학을 다니게 된 것도 한국에서 배우지 않으면 설거지이나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배워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위해 뭔가 나중에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영미 씨의 남한 생활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