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서 보기 드물게 삼형제가 동의사 즉 한의사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셋째인 박태현 씨는 북한에서는 군장교가 되려는 꿈을 가졌지만 남한에서 한의사가 됐습니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세 번 만에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에 합격해 지금은 경기도 광주시에서 묘향산 한의원을 운영하는 원장이 됐습니다. 오늘은 박태현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박태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서 다시 또 확인해봤어요. 또 합격이에요...
1999년 1월부터 남한 생활을 시작한 탈북자 박태현 씨는 지난해 1월, 꿈에도 그리던 말을 듣게 됩니다. 박태현 씨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남한에서 물리치료사가 되겠다고 3년을 공부하다 진로를 바꿔서 한의사 공부를 6년 그리고 졸업 후 한의사 면허 국가고시 시험에 두 번 실패를 경험한 후에 어렵게 일궈낸 성과라 몇 번을 확인하고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습니다.
박태현: 몸이 허공에 붕 떠서 높은 곳에서 착 내려앉는 느낌이에요. 근심을 덜었다는 느낌이었죠. 한숨이 확 나오고요. 이젠 됐다 세상을 다 갖은 느낌이었습니다.
기자: 그때 떠오르는 얼굴이 누구였나요?
박태현: 부모님과 집사람입니다. 아이들도 6살, 7살 이었는데 형수님을 따라 절에 가서 108배를 하더랍니다. 아빠에게 말은 못했어도 아빠가 합격하길 간절히 바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자: 제가 2004년 당시 인터뷰했을 때 삼형제 한의사가 되겠다고 했고 그렇게 됐습니다. 북한 청취자들은 한집안에서 삼형제가 전부 한의사가 됐으니 남한가면 한의사 되기가 쉽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좀 말해주세요.
박태현: 한의대를 들어갈 때는 둘째형이 얘기해서 들어갔습니다. 한자 1천자만 알면 된다고 해서 쉽게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일반 한자와 한의학 용어 한자가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교과서를 보는데 한 장에 한자가 500자가 있다면 아는 글자가 10자 내외였습니다. 진도가 하루에 20장씩 나가는데 읽어는 봐야 하잖아요. 집에 가서 새벽까지 한자 사전 놓고 찾기를 3년을 했습니다. 예과 2학년 때는 한글이 전혀 없는 논어 맹자를 매일 10장을 암기해야 진급이 되는 겁니다. 수업이 끝나면 산에 올라가 서당에서 공부하듯 소리 내 반복해 읽고 외었습니다. 그러니까 외어지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저도 신기합니다.
기자: 한의사 공부하는 사람이 왜 그런 공부를 합니까?
박태현: 논어 맹자가 쉽게 얘기하면 한의사가 아픈 치료하고 하려면 먼저 덕을 쌓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거죠.
기자: 그렇게 공부한 것이 6년인가요?
박태현: 6년인데 국가고시를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그러니까 총 9년 만에 합격을 했습니다.
기자: 제일 큰 고비는 무엇이었나요?
박태현: 저는 매학기가 고비였습니다. 올라갈 때마다 재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남들은 시험 끝나면 방학이라고 좋아하는데 저는 방학이 두 달인데 한 달은 공부하느라 쓰고 한 달밖에 없었죠. 다른 형들은 본과 올라가면서 제는 어미 교수가 잘랐을 것이다 생각했는데 새 학기 되면 가방 메고 또 나온다고 신기해하고 그랬습니다.
기자: 옆에서는 탈북자니까 봐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겠네요.
박태현: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그런 교수님은 없었습니다. 절대 봐주지 않았고 교수님이 기회를 세 번 둘 테니 그 안에 통과 하라고 하면 날밤 세면서 했죠.
기자: 국가고시 떨어지고는 어떻게 생활 했습니까?
박태현: 그 생각하면...본과 한의대 6년 하고 두 번 떨어지고 붙었는데 집사람이 그때 일을 못했습니다. 둘째 아이가 아파서 큰 병원에 다닐 때였거든요. 그 전에 벌어놓은 돈을 까먹고 있었죠. 저는 국시를 떨어져서 계획을 6개월은 돈을 벌고, 6개월은 공부한다.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1년을 꼬박해도 못 붙는데 어떻게 반년만 공부해 합격을 하겠는가? 라는 걱정도 많이 했죠. 그런데 선배 중에 9번 만에 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같이 국시장에 갔는데 그 얼굴에 얼마나 수심이 가득했는지... 그 사람은 20대에 학교 들어갔는데 그때 39살이라고 했습니다.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해 다시 다니고 시험을 본다고 했는데 장가도 못가고 빚더미에 앉았다고 했었죠. 자꾸 그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는데 하도 앉아 있으니까 몸이 자꾸 까라 앉고 기력이 떨어지니까 앉으면 잠이 쏟아지고 했죠.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빼고는 앉아 있으니까 욕창이 와서 앉지를 못했습니다. 5시간 공부하면 4시간 서있고 1시간 앉아있었죠.
기자: 마지막 세 번째 시험 볼 때 1년을 그렇게 생활했다는 말인가요?
박태현: 꼬박 1년을 이게 마지막이다 하면서 죽으나 사나 공부했죠.
기자: 북한에서는 군장교가 된다고 했다가 영양실조로 늑막성 결핵으로 꿈을 접었고 했는데 남한에서 한의사가 된 이후 인생이 달라졌다고 봅니까?
박태현: 한의가 개업한 지 딱 1년이 됐는데 인생이 달라졌다기보다도 무거운 짐은 덜었지만 책임감은 더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대로 침을 놓으면 다 고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임상을 해보니 아닌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침을 맞고 효과가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약을 먹고 설사를 하고 머리 아프다면서 약값을 환불해달라는 사람도 있고요. 사람 대하는 것이 힘들더라고요. 지금도 배워가고 있습니다. 가끔 기쁠 때는 누구 소개로 왔는데 침을 맞으니까 10년 된 사람보다 초보인 내게 맞고 좋아졌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으면 자신감이 생기면서 나도 사람고치는 재주가 있는가 보다 하는 신심이 생기죠.
박태현 씨는 둘째형의 병원과 같은 이름인 묘향산 한의원이란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까다로운 환자로 힘들 때도 있지만 한명의 환자가 건강을 되찾고 기뻐하는 모습에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박태현 씨는 지역주민의 건강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자 삼형제 한의사 중 셋째인 박태현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