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최고라고 알고 계신 분 많을 겁니다. 물론 돈이 많이 있어야 큰집에 살고 좋은 자동차를 탈수 있죠. 다시 말해 돈이 없는 것보다는 많은 것이 좋겠지만 그렇다고 돈이 전부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조건이 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돈보다는 봉사활동에서 행복을 찾는 신은희(가명)씨의 얘기를 전해드립니다.
신은희: 고향 떠날 때는 사람마다 사정이 있잖아요. 저는 여기로 말하면 장사하러 나왔다가 다시 못가고...
북강원도 출신의 신은희 씨는 그저 평범한 북한주민이었고 누구나 하는 것처럼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쓰며 살았습니다.
신은희: 그때 당시는 그래도 남보다 괜찮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중국에서 골동품 이런 것이 팔린다고 가지고 오라고 해서...
물론 당국에서 알면 큰일 나는 불법적인 일이었지만 뭐든 돈이 되는 일이라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2010년 중국으로 장사차 떠난 길이 고향을 영영 등지게 탈북으로 이어집니다.
신은희: 외국생활이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공안을 피해서 일할 수밖에 없고 돈이 필요하니까 중국에서 이일저일 많이 했어요. 그러다보니 회사도 많이 옮겨 다녔고요. 나라 없는 설움이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숨어 살아야하는 것이 제일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신 씨는 부지런히 저축을 했고 2003년에는 중국돈 1만원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 잡혀 북송될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에 남한행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만 몽땅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해 빈손이 됩니다.
가다가 잡힐 수도 있고 또 사기를 당하지 않는 다는 보장도 없기에 한국행을 포기 했는데 중국주재 한국인 회사에 취직을 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우선 한국에 가면 정착금을 주고 집도 주고 대학도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정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맘먹고 행동으로 옮겨 한국에 도착한 것은 2007년.
신은희: 한국에 와서 도로를 봤을 때 어쩌면 도로가 이렇게 잘 만들어졌을까? 도로의 대국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첫인상이고요. 사람 보면서는 중국사람 입었던 옷과 별 차이는 못 느꼈어요. 그런데 한국 와서 하나원 나와 3일째부터 일을 했는데 사람을 대하면서 경계심이 있는 것 같았어요. 자기 속을 터놓지 않고 그냥 시키기만 하고요. 사람을 만나도 차분하고 그런 것은 없고 그냥 냉정하다는 맘이 들더라고요. 내가 더 열심히 일하고 먼저 다가가리라 생각을 했죠.
탈북자가 남한에 가서 흔히들 하는 행동입니다. 즉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자신의 상사를 찾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담당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사장 또는 제일 높은 사람을 직접 만나 얘기하겠다는 거죠.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식당 사장이 시간제 일을 하는 신 씨에게 일터에서 개인적으로 친근감을 꼭 표시해야한다는 법은 없다는 말이죠.
신은희: 저도 당연하다고 느껴졌지만 좀 사장이라도 더 같이 일하는 사람을 잘 대해주고 하면 능률도 오르고 하지 않을까? 내가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냉정하게 하는 것보다 따뜻하게 대해주면 일하는 입장에서 내 집 일처럼 진실로 해주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신 씨는 중국에서 반쯤은 자본주의 경험을 해봤지만 남한에 가서 새로운 직종의 일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신은희: 간호사일도 해보고 식당 서빙도 해보고 뷔페에서도 일해 봤어요.
식당 서빙과 뷔페일이란 간단히 말해 음식점에서 접대원으로 일해 봤다는 얘깁니다. 식당일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용어만 조금 알면 그리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어 탈북여성이 많이들 하는 직종입니다. 그런데 신 씨는 간호사일을 한 것이 특이합니다.
신은희: 제가 그래도 선택은 잘했다는 생각을 간호사일하면서 느꼈어요. 남을 도와줄 수 있고 그분들과 얘기도 하고 의사의 지시를 받는다고 해도 그분들과 소통하고 하는 시간도 있고 하니까요.
기자: 어떤 병원이었나요?
신은희: 산부인과 의원에서 일했어요.
대학에서 정식으로 간호학과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간호사 보조를 하는 조무사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부인과 병을 보는 의원에서 일한 겁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월말에 급여를 받기 때문에 월급 받는 다는 말을 합니다. 일에 따라 그 액수는 천차만별인데 예전에는 현금으로 노랑봉투에 넣어서 줬기 때문에 월급날은 호주머니가 두둑했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거래은행 자신의 구좌에 바로 입금을 시켜주기 때문에 현금이 아닌 월급명세서를 받게 됩니다.
신은희: 저는 첫 월급 탈 때 통장에 보내지 말고 현금을 주라고 했더니 봉투에 넣어 주더라고요. 첫 월급을 받고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었어요.
기자: 두둑했습니까?
신은희: 네, 두둑했어요.
중국생활과 남한생활을 다 해본 탈북여성 신 씨는 환경이 틀려도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이 통하는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신은희: 남한이나 북한이나 어디나 열심히 살면 되더라고요. 그런데 남한에 와서 열심히 사는 것은 더 중요하더라고요. 왜냐하면 돈을 벌면 다 내 돈이 되니까요. 그런데 탈북자분들이 열심히 사는 것만 했지 대인관계를 잘 못해요.
열심히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은 알겠는데 신 씨가 말하는 대인관계는 뭘까?
신은희: 열심히도 하지만 대인관계를 잘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쓸 줄도 알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북한 사람은 배급만 받고 살다보니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기 할 나름인 것 같아요.
신 씨는 남한에 가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경영을 배우고 있습니다. 올해 입학을 해서 몇 년을 더 해야 졸업을 하게 되는데 신 씨는 남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해 한 시간 늦게 퇴근한다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신은희: 행복한 것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요양보호사 자격증 딸 때 실습으로 자원봉사 나갔는데 그분들을 도와주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돈 버는 것만 신경을 썼는데 남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한 마음에 봉사를 많이 했어요. 봉사를 하고 나면 그분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시간만 나면 또 자원봉사도 하고 그분들과 얘기도 하고 하니까 저는 돈보다 제일 좋았던 것이 남을 도와줄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내가 웃을 수 있다는 겁니다.
신 씨는 북한에서 먹지 못해 배고픔의 설움도 느껴봤고 탈북해 나라 없이 타지에서 숨어 사는 처량함도 경험해봤습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된 겁니다. 돈은 수입이 늘어도 만족을 주지 못하고 한데 남을 돕는 일에는 잠깐이라도 행복을 무한정 느낄 수 있기에 항상 봉사를 통해 부자마음을 갖고 살고자 한다 말합니다.
신은희: 놀러 다니는 것은 시간 있으면 저희가 많이 놀러 다녀요. 나 하나만 다니는 것보다 봉사하면서 그분들과 함께 다니면 좋더라고요. 나를 위해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보다 힘든 분들 도와주고 그분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알고 도와주는 것이 저의 목표에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신은희(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