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만들어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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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행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살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북한 주민이 먹고 살길을 찾아 또는 나름대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고향을 떠나 낯선 환경의 남한으로 갑니다. 오늘은 행복을 만들어 가는 세 명의 탈북여성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남한생활이 5년차가 되는 이금순(가명) 씨는 되돌아보면 참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이금순: 우선 제일 두려운 것이 어떻게 이 사회에서 살아가겠는가? 제일 무서웠어요. 해가 나는 날은 그림자라고 있지만 흐린 날은 그림자도 없어요. 저밖에 없고 혈혈단신이라 무서웠고 오긴 왔지만 두려웠어요. 이력서를 내고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실망도 크고 했죠. 돈이 필요해서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기자: 받아주는 곳이 없는데 해본일은 뭔가요?

이금순: 네, 우선 당장 작은 아파트는 줬지만 밥해먹으려면 밥가마도 있어야 하고 숟가락도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한데 브로커 비용을 주다 보니 일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벼룩시장을 뒤졌어요. 일한 곳이 식당인데 사발 씻는 일부터 …

이 씨가 말한 벼룩시장을 뒤졌다는 말은 각 동네마다 일할 사람을 찾는 업체가 구인광고를 내고 그 직종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놓은 것을 모아 배포하는 무료정보지가 있는데 그 정보지의 이름이 벼룩시장입니다. 시간제 일을 찾는 사람이 많이 봅니다. 이 씨는 식당광고를 보고 찾아갔고 기술이 없어도 시작할 수 있는 노동일을 하게 된 거죠. 그래도 만족했다고 하는데요.

이금순: 뭐가 제일 좋았나하면 북한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무조건 배치하는 대로 가야해요. 그런데 여기는 뭐든 맘만 먹으면 선택할 수 있으니 좋았고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좋았어요. 조금씩 돈이 모이는 것을 보면서 좋았고 내가 노력한 만큼 차려지는 것이 제일 좋았어요.

이 씨는 처음 아홉 평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해 지금은 그 두 배가 넘는 집을 구입해 살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없고 빈손으로 시작할 땐 차려진 것보다 구입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아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사야하는데 그러자면 돈이 필요하죠. 그래서 남한정부는 탈북자에 초기정착에 필요한 정착금을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총 7천 달라 정도가 되는 데 한 번에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현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일정기간에 걸쳐 통장에 입금됩니다.

이러한 탈북자에 대한 정부 지원은 5년까지고 그 이후는 자신이 독립해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서 또는 신체적 장애 등으로 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땐 남한사람이 받는 지원을 받게 됩니다. 공릉종합사회복지관 김선화 부장입니다.

기자: 직업을 갖지 못한 탈북자는 남쪽에서 어떻게 생활이 가능한 겁니까?

김선화: 기본적으로 한국은 국가가 근로능력이 있든 없던 소득이 없는 분들에겐 최소생계비를 지원합니다. 근로능력이 있지만 현재 취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계비를 필요로 한다면 일정 조건을 부여하고 생계비를 지원하면서 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65세 이상 혹은 장애인과 어린이는 지원을 하고 대학생은 근로능력은 있지만 공부하기 때문에 취업을 할 수 없어 이런 경우 국가에서 최저생계비를 지원해 생활할 수 있도록 보호해드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즉 경제적 능력이 안 될 때는 나라에서 그 사람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기본은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이 책임지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현재 남한에 사는 탈북자 열 명중 일곱 명 이상이 여성이고 또 많은 수가 은퇴할 나이라고 가정할 때 정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이 또는 주어진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끊임없이 도전하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에서 교사로 25년 생활하다 탈북한 김희선(가명)씨는 이제 환갑의 나이가 됩니다. 하지만 지금도 모르는 것은 배운다는 마음으로 부단히 노력합니다. 지금은 지역신문의 편집장이 돼서 취재부터 인쇄과정까지 총괄합니다.

김희선: 어려움은 제가 이만한 일을 짧은 기간에 할 수 있기까지 어려움은 컴퓨터 배우는 일이 힘들었어요. 컴퓨터 학원을 오전에 다니고 그것 끝나면 4시부터 또 다른 학원에 다니고 7부터 10시까지 알바를 했어요. 그래 돈을 벌어서 계속 공부를 했단 말입니다. 지금은 동영상 편집을 하고 타자는 300자를 치고요. 20대 어린 아이들과 공부를 하다 보니 따라가기 힘들었어요.

또 다른 탈북여성 황은선 씨는 남한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북한으로 치면 준박사라고 하는 대학원 과정에 있습니다. 어떤 직업을 갖기 위해 하는 공부라기보다는 예전에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배움의 즐거움이 크기 때문에 공부를 멈출 수 없다고 합니다.

황은선: 저도 모르겠어요. 재밌는 거예요. 저도 이 나이에 일을 해야지 왜 이렇게 공부에 집착을 하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내가 변하면서 아이가 변하더라고요. 아이가 학교 가기 전에 아이를 때렸어요. 그런데 아이가 학교에 진학하고 지켜보니까 내가 한 것은 처벌이었던 거예요. 아이의 말을 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아이 입장에서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저는 전문대학에서는 이론을 배웠다면 학사과정인 3-4학년에선 발표와 토론 위주로 하니까 너무 재밌는 거예요. 내가 생각한 반대 이론을 듣고 하니까 다른 쪽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솔직히 시험 때는 스트레스를 받지만 시험치고 나면 성취감을 맛보는 거예요.

남한에 가서 배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하는 만큼 자신에게 차려지기 때문에 힘들지 모르고 일했다고 말하는 이금순 씨. 또 나이를 잊고 모르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경쟁적으로 공부해 지금은 신문사 편집장이 된 김희선 씨. 아이와 함께 공부하면서 딸아이는 중학생이 됐고 자신은 대학원생이 됐다는 황은선 씨.

이 세 명의 여성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너무도 원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고 또 지금의 모습에 만족한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들 모두가 탈북자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황은선: 지금 생각해봐도 먹지 못해서 감자 껍질 뜯어먹고 풀뿌리 먹고 그것이 잊히지 않아요. 남한에 배고파 왔지만 먹을 것 충분하니까 더 좋은 것을 원하게 되는데 저는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고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게 살고 싶어요. 북한에서 남한에 너무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북한 생각하면 언니 걱정이 되는데 잘 먹고는 있는지 그런 생각도 들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자신은 성공했다고 말하는 탈북여성 세 명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