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간 북한출신 중에는 탈북 해 중국에서 10년 이상 살다가 간 여성이 많습니다.
대다수가 남한에 가는 선을 찾지 못해서 또는 현지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기 때문에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남쪽 사회가 어떤 곳인지 확신이 서질 않아서라고 하는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5년차인 조미영(가명) 씨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함경북도가 고향인 조미영 씨가 탈북한 것은 1998년입니다.
조미영: 두만강 건널 때도 혼자 건넜어요. 강 건너니까 산이 있더라고요. 산하나 넘고 제일 먼저 불빛 보이는 집에 들어가서 문 두드렸어요.
북한에서 열차원이었던 조 씨는 불법으로 물건을 전달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일을 하다
발각돼 처벌이 두려워 탈북하게 됐다고 합니다. 당시 북한 상황은 살기 위해 뭣이든 해야만 했을 때여서 위험한줄 알면서도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겁니다. 하지만 탈북 해 중국에서의 생활은 또 다른 고통 즉 막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조미영: 중국에서는 중고 물건 되파는 일도 하고 식당일도 하고 민물고기 배를 갈라 다듬어 주는 일도 하고 집을 허물면 판자에 대못 박힌 것 빼서 파는 일도 하고 농장일도 하고요..
진통제를 먹으면서까지 힘든 현실을 운명으로 알고 살다가 남한 행을 결심하기 까지는
10년이란 세월이 걸립니다. 바로 그의 나이 서른다섯 때의 일입니다.
기자: 중국에서 위성텔레비전도 보고 소문도 듣고 했을 텐데 남한에 대해서는
알고 가신 거죠.
조미영: 아니요. 처음에는 안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옆에 있던 친구들이 하나 둘 남한에
가고 갔다가는 중국에 놀러 오고 한국이 좋다고 하니까 그 말을 듣고 가도 되겠다 해서
남한에 간 겁니다.
기자: 친구들 다시 만났을 때 첫인상이 어땠나요?
조미영: 좋았죠. 옷도 잘 입고 우선 자유롭게 보이고요. 한국에서 국적을 주고 신분증 주고 하니까 제가 가겠다고 맘먹은 겁니다.
기자: 남한에 가보니 현실이 어떻던가요?
조미영: 남한에 오니까 중국에서처럼 숨어 살지 않아 좋고 내가 일한만큼 벌어먹고 살고
하니까 적응은 금방 했어요.
기자: 반면에 기대한 것에 못 미치는 부분도 있었을 텐데요.
조미영: 당연히 있었습니다. 건강이 따라 안주니까 벌어야 하는데 일을 못 하니까 힘
들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죽을둥말둥 모르고 벌었거든요. 한국에 와서 국적 취득하고 긴장을 푸니까 아픈 곳이 다 나타나는 거예요. 저는 허리가 안 좋아서 조금만 무리하면 진통이
다리까지 뻗쳐서 못 걷거든요. 중국에서는 진통제만 먹고 병원에 못 갔는데 여와서
병원에 가니까 디스크가 심해졌더라고요.
2008년 당시 열 살 된 딸과 남한 생활을 시작합니다. 지금 딸은 15살로 중학교 2학년
입니다.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전혀 한국말을 못했기 때문에 마음고생이 컸는데 이젠
다 옛말이 됐습니다. 말 그대로 완전히 한국아이가 됐다고 합니다. 아이 뒷바라지를 하면서 컴퓨터 학원도 다니고 지병인 허리 치료도 하면서 조미영 씨가 하는 일은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입니다.
조미영: 시에서 운영하는 복지 간병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까지 하루 8시간 일하는데 돈 없는 수급자들이 병원에 입원하면 우리가 한 명씩 간병을
10일간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시에서 우리에게 월급을 주고요.
기자: 한 달에 며칠 일하시는 겁니까?
조미영: 한 달에 20일 일하는 겁니다. 공휴일은 전부 쉬고요.
간병인 일은 1년째 하고 있습니다.
기자: 시 공무원인가요?
조미영: 아닙니다. 공무원은 아니고요. 저도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자주 하니까
회사 일을 못하죠. 어느 회사에서 아픈 사람을 쓰겠어요. 저도 수급자인데 수급자가
입원하면 돌봐주면서 그 동안 일을 못하니까 시에서 월급으로 간병인에게 한 달에
80만원을 받습니다.
기자: 모녀 가정으로 아는데 수급자로 간병인 일을 하면서 수입이 얼마가 되는 겁니까?
조미영: 딸 앞으로 35만 원 생계비가 나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경제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정부가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을 해서
도움을 줍니다. 만약 조 씨가 일을 하지 않고 생활지원금만 받게 되면 40만원, 미화로
약 350달러를 받는데 조 씨는 같은 저소득 계층의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40만원이
아니고 80만원 즉 두 배의 돈을 정부에서 받는 다는 말입니다.
물가가 비싸기로 하자면 전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인 남한에서 한 달에 천 달러가 조금
넘는 돈으로 생활 한다는 것이 결코 넉넉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이 있고
또 북한이나 중국 보다는 편리한 생활에 대단히 만족한다고 합니다.
조미영: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화장실에 가자면 공동화장실을 가는데 가도 뜨거운 물이
잘 안 나와요. 한국은 아파트 안에 화장실도 있고 그리고 더운물도 계속 나오지 하니까
저는 아파트가 너무 좋아요. 지금 딸하고 둘이 사는데 나중에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도 내 집에서 나가기 싫을 정도로 이 집이 좋아요.
열차원 출신이라 조 씨는 남한에서도 열차를 탈 때면 잊고 있었던 북한 생각이 자연스레
난다고 하는데요.
조미영: 열차도 북한하고는 대비가 안 되죠. 북한은 98년에 열차에 창문도 도둑을 맞아서 없었습니다. 화장실도 좋고요. 북한도 열차에 화장실이 있지만 낡고 더럽죠. 여기는 열차가 깨끗하고 좋고 하니까 여기서 열차원하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고요. 또
여기는 조금만 가진 것이 있으면 누구나 내차를 운전하는 것이 좋고 밥할 때도 압력밥솥 있지 전자레인지 있어 데워먹기도 좋고 자전거, 오토바이도 싸지... 편리한 것이 많아요.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법. 조 씨는 간병인 일을 하면서 퇴근 후에는 집에서 컴퓨터
인터넷을 통해 수업을 듣는 사이버대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의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준비 하는 겁니다.
조미영: 꿈이란 것은 사회복지 사 자격증을 따서 보육교사가 되는 겁니다. 아이들 돌보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지금 사이버 대학에 다니고 있고 3월에 요양보호사 자격증 따고 어제는 운전면허도 땄습니다. 눈이 안 좋고 겁이 많아서 안하려고 했는데 요즘 자신감이 좀 생겨서 운전면허도 땄습니다. 사회복지 공부 하니까 앞으로 나도 남 밑에서만 일하지 않고 활동적으로 생활하면서 보육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조미영(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