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북구, 작은나눔봉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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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세상을 값지게 사는 법 중 하나는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서 함께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제 남한생활 10년차가 되는 탈북여성 김현숙(가명)씨입니다. 단체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소외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는데요. 오늘은 부산의 ‘작은나눔봉사단’ 대표 김현숙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현숙: 배급은 안줘도 장사를 맘대로 하게 했으면 우리주민이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안 하거든요.

북에서는 당원이었던 김 씨는 일반 주민보다는 좀 나은 생활을 하지 않았는가?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탈북당시에는 당원이나 주민들이나 자력갱생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김현숙: 1998년은 북한이 고난의 행군시절이라 장엄했습니다. 누구나 중국에 친척이 있는 분은 탈북 시도가 많아서 저도 한주일 휴가 받고 들어가서 돈이나 방조 받으려고 갔는데 중국에 가보니 친척들도 생활이 힘드니까 생각대로 되지 않았어요.

중국 친척에게 돈 조금 방조 받고 옷을 크게 두 보따리 해서 고향으로 가려고 하니 중국에 있는 친척들은 한사코 만류합니다. 남들은 기를 쓰고 나오려고 하는데 왜 다시 북한으로 돌아 가냐는 거였죠. 북한에 가지 말고 돈을 벌어 보내면 가족도 다 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이 말에 김 씨는 중국 땅에 주저앉고 맙니다. 그리고는 강제북송과 재탈북이란 기구한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김현숙: 네 번의 북송을 가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 한마디는 해야겠습니다. 강제북송 당해 나가면 진술서를 많이 쓰는데 오직 한 가지만 썼거든요. 나는 중국에 친척을 보러 나갔고 돈을 벌자고 했는데 공안에 잡혔다고 네 번씩 나가서도 이 문장만 쓰다보니까 어느 날 보위부 직원들도 내게 돈이 있냐고 묻더군요. 내가 300원이 있었는데 그 돈을 주고 탈출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나와서는 더 이상 연변에 있을 수 없어서 산동성 청도에 가니까 거기는 한국 회사도 많고 북한 동료도 만나서 한국을 알게 되고 한국 방송을 보면 탈북자들이 대사관에 진입하고 하는 것을 보니까 용기가 나더라고요.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북한사회. 한 두 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북송을 당했고 다섯 번을 탈북해 남한으로 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김현숙: 저는 시골에서 머슴살이 하면서 번 돈을 항상 신발깔창 밑에 넣고 다녔는데 그 돈을 주고 나왔습니다. 그것이 2001년부터 4번을 북송 당했습니다. 해마다 붙들려 나간 셈이죠. 두 번은 힘들게 3개월 노동단련대 생활도 하고 했는데 세 번째 탈북해서는 붙들려 나가더라도 중국에 다시 와야 한다.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 한다 생각해서 300백 원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

2004년 여름 드디어 김 씨는 남한행을 결심하고 서울땅을 밟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37살. 몇 번을 죽다 살아났으니 이젠 자유 세상에 가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미 김 씨의 몸은 많이 망가진 상태였고 심신이 지쳐 정상생활이 어려운 지경입니다.

김현숙: 왜 힘들었다고 하냐면 낯선 땅에 혼자 와서 살자고 하는데 뭔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공포심이 있었는데 지금도 꿈을 꾸는데 중국 공안이 사복입고 북한 사람들을 막 잡아가고 그런 두려운 감이 있습니다. 그 공포증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병원을 많이 다녔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데리고 오자고 했는데 많이 실패를 봐서 좌절도 하고...

처음 3년은 지친 몸을 추스르고 병을 치료하면서 짬짬이 시간제 일을 하면서 적응 시간을 갖습니다. 제일 자신 있는 일부터 했는데요.

김현숙: 저는 요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차 운전은 안합니다. 공포증이 있어서 면허 시험을 갔다가도 그냥 왔습니다. 공포증이 있다 보니까 요리 하는 곳에 많이 찾아다니고요.

그러던 중 봉사활동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돈을 벌어 잘 먹고 잘살기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찾아가 궂은일을 해주며 도움을 주는 일이 그것입니다.

김현숙: 보안계 전 형사님들이 탈북자 몇 명과 체험학습을 갔습니다. 거기 가니까 80여명 가는 어린이 지체장애인들이 누워있었습니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눈을 맞추는데 움직이질 못하는 아이들 목욕도 시켜주고 하면서 내가 친척 형제가 없이 사니까 제일 불쌍한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우리를 이모라고 부르고 감사 인사를 할 때 이 길이 내가 갈 길이다 하고 한 달에 세 네 번씩 다녔거든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2년 전부터 봉사원이 많아지더니 이젠 1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5년째 하고 있는데 지금은 아주 반응이 좋습니다. 부산 북구에서 탈북자 작은나눔봉사단이 광역시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는 7월 5일 시청 강당에서 발대식을 합니다.

김 씨는 자본주의 사회란 것이 돈이 최고이고 자유란 것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이면에는 남을 배려하는 따뜻함이 있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김현숙: 교단에 선 선생님들 또 경찰 분들도 인사를 얼마나 정직하게 잘하는지 모릅니다. 북한에서는 안전계통이나 보위부 계통의 정문만 들어가면 야, 너 어디가나? 하고 막말을 아래 위 관계없이 던지는데 여기는 인사를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의료기관에 가도 북한하고는 다르고요. 이렇게 선진국이 됐으니 다른 나라에서도 돈 벌로 한국에 온다 하고 느꼈고요.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 큰 욕심 없이 더불어 사는 인생을 만들어가겠다는 김현숙 씨 작은 것에 만족하고 남들이 외면하는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우리의 소중한 이웃입니다.

김현숙: 저는 행복합니다. 사는 수준을 보면 한국에서 보면 하위층 입니다. 하지만 내가 노력하는 것에 따라 반찬수도 늘 수 있는 것이고요. 저는 준비라고 하기보다 아이를 키우면서 보면 엄마가 북에서 왔다고 보는 그런 편견을 좀 있는데 아들 보기에 열심히 사는 긍정적인 모습도 보이고 싶고 가정에서는 항상 평범한 주부로서 집안일 잘하고 살림 잘하면 남편이 나가 일하기 수월하니까 지금처럼 앞으로도 욕심 없고 순수하게 사는 주부가 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부산에 사는 탈북여성 김현숙(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