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 열차 승무원이었던 여성이 남한에 가서 계약직 공무원이 됐습니다. 취업을 위해 준비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탈북여성 김혜영(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혜영: 많이 공부도 하고 발표하는 교육도 받고 했어요. 교육을 받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 씨는 한 달 전 춘천 시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이 돼서 매일 시청에 출근합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시 인민위원회 청사로 출근하는 건데요.
기자: 한 달 동안 해보니까 예상했던 것과 비슷하던가요?
김혜영: 예상을 못했고요. 사무실 일을 해본 적이 없어요. 막일만 하고 그랬는데 수도요금과에 가보니까 경영지원과 상하수도과 이렇게 있어서 처음에는 제일 안 좋은 곳에 보냈구나 생각했는데 가보니까 그게 아니고 수도요금 관리하는 것인데 컴퓨터도 배우기만 했지 실제 경험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지금은 그래도 어지간히 할줄 아니까 괜찮아졌는데 처음 10일 정도는 몰라서 고생했습니다.
기자: 공무원으로 생활하면서 정말 좋다 이런 것은 어떤 때 느끼십니까?
김혜영: 아침에 출근할 때 시청 정문으로 들어갈 때는 마음이 뿌듯해요. 처음에는 계약직이니까 이것도 만족했는데 한 달이 되면서부터 점점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남한에는 도시던 시골이던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상수도 시설이 돼있어 수돗물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생활폐수는 하수도를 통해 정수장으로 가서 깨끗한 물로 걸러집니다. 이런 시설을 이용하는 데 시민은 자신이 사용한 물 값을 내는데 이 물 값을 관리하는 부서에서 김 씨가 일하는 겁니다.
김 씨는 1998년에 탈북 했고 중국에서 10년 있다가 2008년 한국에 갑니다. 잠깐 어떻게 고향을 떠나게 됐는지 들어봅니다.
김혜영: 그때 98년에 열차 승무원으로 일했는데 보따리 장사를 했어요. 골동품을 청진에서 무산에 날라 주고 그에 대한 보수를 받고 했는데 골동품을 가지고 오다가 열차 안전원에게 회수 당했어요. 골동품이란 것이 비싼 것인데 물건을 못주게 되니까 북한에 남아 있으면 가족이 골동품 가격을 치루지 못하니까 힘들겠구나 그래서 나 하나 사라지면 되겠지 해서 나왔어요.
처음 남한에 가서는 식당일 하다가 강원도 춘천에 가서는 시골에서 고추농사도 하고 간병일도 했고 비누 만드는 일도 해봤다는 김 씨. 처음 3년은 다른 환경에 적응하느라 무척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김 씨는 힘들 때마다 장윤정이 부른 “왔구나 왔어”란 노래를 듣습니다. 잠시 들어볼까요?
(장윤정 왔구나 왔어요...)
이렇게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힘든 것을 잊었던 겁니다. 시청에서 사무직일을 하기 전까지 김 씨는 건강이 나빠져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정부지원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실업상태였는데요. 그렇다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언제든 기회가 되면 일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혜영: 먼저 컴퓨터 자격증을 땄고요. 서울에 다니면서 교육도 많이 받았고 상담사 자격증을 따면서 욱하는 성격도 많이 고쳤고 그래서 이번에 시청에서 면접 보는 것도 자신감을 가지고 봐서 합격돼 근무하는 겁니다. 면접 보러 갔을 때 떨리지는 않았고 자신감 있게 했는데 첫 질문이 왜 지원했는가 하고 물어봐서 제가 다른 지역은 동사무소 하나센터엔 탈북자가 근무하는 데 여기는 없다 그러니 채용해달라고 했고 공무원에 대해 말해봐라 했는데 저는 공무원이 보이지 않게 고생을 많이 한다고 나쁜 점은 못 찾겠고 칭찬을 했어요.
회사생활에 필요한 기본 컴퓨터 교육을 받았고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대인관계에 필요한 인성교육을 받으며 상담사 자격증도 여럿 취득한 겁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외모에도 커다란 변화를 줬는데요.
김혜영: 머리가 길고 노란머리였는데 이번에 면접을 보면서 단발로 자르고 색도 검은색으로 하고 정장, 구두를 사고 투자를 했어요. 단정하게 하고 면접을 봤고 첫인상을 면접관이 봤을 때 믿음이 가게하고 갔습니다.
40대 초반의 김 씨는 작은 키에 노란색 긴 머리로 얼핏 봐서는 차림이 평범한 가두여성처럼 보이지 않는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좋게 보이기보다는 좀 유별나다는 말을 주위로부터 들었습니다. 변신을 한 거죠. 거기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김혜영: 북한에선 열차 승무원을 하니까 머리도 못 기르고 염색도 못하고 했으니까 남한에 와서 하고 싶은 것을 했고 옷차림도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어서 했어요. 북한에서는 제복만 입었는데 남한에서 입고 싶은 예쁜 옷을 입었으니 꿈을 이룬 거죠.
기자: 면접 보러 갈 때 정장하고 머리도 자르고 하는 것은 누가 해줘서 그렇게 한 것인가요?
김혜영: 누가 얘기를 해준 것이 아니라 면접 며칠 전부터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정장을 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하고 이런 것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한 거죠.
단정하게 변화한 모습을 보고 제일 기뻐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남한에서 만난
남편입니다. 김 씨는 남쪽 생활이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많은 부분 자신이 맘먹기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대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둔 것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말합니다.
김혜영: 힘들었던 순간은 3년전 까지는 한국에 와서 돈 벌고 막 지냈는데 힘들었어요. 그런데 공부하고 힘들 때마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만 번씩 했어요. 이 말이 마음을 안정시키더라고요. 매일 하루에 만 번씩 감사합니다란 말을 하면서 좋은 일도 생기고 하면서 취직이 돼서 살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혜영(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