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주민의 탈북 이유는 더 이상 그 땅에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탈북하게 됐다는 사람이 많지만 그 중에는 남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탈북하게 됐다는 이도 있습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5년 차인 이호휘(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호휘: 제가 책보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 보기를 좋아하는데 처음 남한 영화를 본 것은 2000년 초입니다.
함경북도 출신으로 50대 중반의 이호휘 씨는 북한에서는 성분 좋은 당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장도 힘든 노동이 아닌 사무직이었는데요. 1999년부터 녹화기가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영화 보기를 좋아했던 이 씨는 녹화기를 빌려서 남한 영화를 보는데 푹 빠지게 됩니다.
이호휘: 남한은 미제의 식민지이고 정치적 자유와 권리가 없고 굶주렸다 했는데 남한 영화를 보면서 뭔가 다르구나 하는 인식을 가지면서 더 많이 보게 됐어요. 그리고 마음이 통화는 사람들에게 씨디알을 빌려줬는데 그게 단속에 걸렸어요. 저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줬기 때문에 유포 선전 죄에 걸려 잡혔어요.
처벌을 피해 결국 탈북하게 됐다는 건데요. 북한에서 봤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한 남한 드라마는 정보석 씨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가시고기. 백혈병이 걸린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내용으로 하는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드라마와 영화는 남자의 향기, 약속, 장군의 아들 등이l 있습니다. 갑작스런 탈북이었기에 경황이 없었고 중국에서는 숨어사는 처지가 되고 마는데요. 중국에서는 2년 반 정도를 사람의 인적이 별로 없는 산골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이호휘: 인간다운 생활이 아니죠. 아무런 정치적 자유와 권리가 없이 더군다나 숨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더라고요. 그래도 북에서는 당원이었던 여자가 깊은 산골 연자방아 돌리고 당나귀 타고 다니는 곳으로 갔어요.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나이 먹은 영감에게 팔려가서 떼기 밭에서 옥수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어요. 그런데도 잡혀갈까봐 밤에도 옷을 못 벗고 오토바이 소리만 나도 놀라고 하니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같은 마을에 사는 또 다른 북한 여성을 통해 남한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된 이 씨는 아무런 미련 없이 중국을 떠나 남한으로 갑니다. 그리고 2009년 드디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알던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이호휘: 북한에서 어렸을 때는 근심 걱정 없이 살아서 우리나라가 제일 좋은 줄 알았어요. 다른 나라도 이렇게 사는 줄 알았죠. 우리 외삼촌이 말 한마디 잘못해서 잡혀갔는데 이게 정치적 탄압인 줄 느끼지 못했어요. 다른 나라도 그런 줄 알았어요. 여기 와서 보니까 북한 같은 나라가 없더라고요. 북한에 새삼스런 증오심이 생기는 거예요. 제가 아직 북한에 있었다면 진짜 노예처럼 산다는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보고 듣는 것이 없으니까요. 여기 와서 모든 것이 자유잖아요. 대통령을 욕해도 잡아 안 가잖아요. 그게 저는 좋았어요. 북한에서는 국가에 메인 물건 같았어요. 국가에서 하라는 대로 했는데 여기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결정하는 무한한 결정권이 있잖아요. 대학도 수능을 보고 자기 적성대로 갈 수 있잖아요.
북한에서는 당원이었지만 남한에서는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야 했습니다. 물론 문화가 틀리고 일상 언어에 서툰 점은 있었지만 배움에 있어선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호휘: 제가 처음에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직업을 찾았는데 아는 분이 대학 식당에 소개를 해주더라고요 그런데 일주일 하고 너무 힘들어서 그만 뒀어요. 나이가 있으니까 몸으로 하는 일이 아닌 다른 전문 직업을 갖자 해서 보니까 간호조무사는 많이 찾더라고요. 학원을 갔는데 나이가 있어서 공부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있다고 하고 시작했어요. 저는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거든요. 힘들지 않더라고요.
최근에는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 컴퓨터 학원에 다니면서 새 직장에 들어갈 준비 중인데요. 남한에는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사라진지 오랩니다. 자기가 더 나은 곳을 찾아서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기도 하지만 경영이 어려워 직원 수를 줄이면 갑자기 일터를 본의 아니게 떠나야 되는 일도 생깁니다. 이 씨는 좀 더 경쟁력을 갖기 위해 저녁에는 야간대학도 다니고 있습니다.
이호휘: 제가 작년 3월부터 2년째 다니고 있는데 요양원이란 곳이 복지시설 아닙니까? 직업이 간호조무사이면서 복지를 공부하면 시설에서 간호사, 복지사로 일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공부하게 됐죠. 내가 한국에 좀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나이를 먹어서 직업을 찾는 것도 힘들어요. 좀 빨리 왔으면 교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나이가 있어서 아무래도 배우는 것이 마음처럼 잘 되지 않고 몸이 힘들다고 말하는 이호휘 씨 하지만 포기 하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다며 죽을 때까지 계속 배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남한생활에 대해 방송을 듣고 있는 청취자를 위해 이런 말도 전했습니다.
이호휘: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라 잠시도 한눈팔고 땡땡이 부리면 안 되는 세상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 그리고 남한사회가 결코 헐하게 먹여주고 입혀주는 그런 사회라고 생각하지 말라, 모든 것은 자기가 주인이니까 자기운명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열심히 일한다면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나라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목적의식 없이 살았는데 지난날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야 하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산다는 이호휘 씨. 그는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배우고 일하면서 남은 인생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호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져야겠죠. 솔직히 말해 절망에 빠진 사람을 버리지 않고 먹고 살게 해주잖아요. 내 힘닿는데 까지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이 나라에 손 내밀지 않는다 생각이에요. 제가 다리가 아파서 노동능력 상실 판정을 받았지만 4대보험이 있는데서 일해요. 저는 기초수급자로 사는 것을 창피로 여기거든요. 65세 넘어서 제가 더 벌지 못하면 몰라도 제 힘으로 살 수 있는 데까지는 도움 받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생활이 5년차인 탈북여성 이호휘(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