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주민이 탈북해 남한으로 가서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동의사는 매년 증가세에 있고 기자나 정치인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종합예술이라고 불리는 영화 쪽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탈북자가 있어 소개합니다.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 김규민 씨입니다.
김규민: 어렸을 때부터 한국 방송을 자주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북한이란 사회가 모순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상태에서 식량위기가 닥치면서 엄청나게 아사를 하고 하니까 그런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탈북하게 됐습니다.
중학교 때 우연히 남한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되면서 북한이 아닌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김규민 씨. 그는 남한생활 10년만에 겨울나비란 제목의 작품으로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 제1호가 됩니다.
황해북도 출신의 김규민 감독은 첫 번째 탈북에서는 두만강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지도 한 장을 가지고 겁 없이 떠난 길이었다고 했습니다. 잘 몰랐기 때문에 더 용감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김 감독은 한 편의 영화처럼 강을 건너 중국 땅을 밟게 됩니다.
김규민: 실제로 눈앞에서 군인들에게 쫒기기는 처음이었죠. 첫 번째(1999년)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했던 것이고 두 번째는 한 번 경험이 있어 여유는 있었어요. 처음 강을 건넜을 때는 5월 이었는데 너무 추웠기 때문에 두 번째 탈북에서는 바지를 벗고 건너려고 하다가 이상해서 옆을 보니까 3미터 거리에서 군인이 술을 먹고 잠을 자고 있더라고요. 너무 놀라서 무작정 물에 뛰어들었죠. 거의 건넜는데 뒤에서 군인이 소리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
김규민 씨는 북한에서부터 줄곧 배우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조금씩 현실에서 수정되고 현재에 이르게 된 겁니다.
김규민: 저는 계속 연기자가 꿈이었습니다. 하나원에서는 시끄러운 것이 싫어서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겠다고 했죠. 다른 사람들은 서울을 선호했지만 저는 나주를 갔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배불리 먹고 행복했던 것이 사과배 농사를 짓던 때라 한국에서도 배농사를 지으면서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거죠.
기자: 북한에서도 대학을 다녔습니까?
김규민:네, 북한에서도 대학을 3년정도 다니다가 자퇴를 해서 혁명화를 갔는데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 이야긴데 제가 처음 왕따를 당했던 것이 대학 첫 선배들과 만나는 날이었습니다. 북한식으로 생각하고 동대문에 가서 고급은 아니지만 맞춤정장을 한 벌 하고 바바리코트를 사 입고 간 겁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 대충 입고 온 거예요. 자기들끼리는 아는 척도 하고 하면서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거는 거예요. 내가 탈북자란 것이 소문이 났구나 생각했죠. 선배들이 신입생 이름을 부르니까 하나하나 일어나고 저도 일어났는데 아이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제 옷차림을 보고 교수인줄 알았다는 거예요.
여러 학과 중에도 연극영화과는 배우자나 연출자가 되기 위한 학생들이 가는 곳으로 개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학생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다 보니 초창기 적응에는 쉽지 않았죠.
김규민: 대학을 다니는데 3일쯤 됐을 때 수업을 듣다가 영어를 많이 써서 선생님들 말하는 것을 알아듣기가 힘든 거예요. 북한에서는 수업시간이 떠드는 것을 못 봤는데 아이들이 너무 떠드는 거예요. 일어나서 욕을 하면서 조용하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기겁을 한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제가 수업 들어가면 쥐죽은 듯 조용했죠.
기자: 그 당시 김 감독님 나이가 몇이었나요?
김규민: 27살 정도였을 겁니다.
기자: 한국에서는 군대 제대한 복학생들 나이인데 연극영화과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땠습니까?
김규민: 아이들이 처음에 저를 피하더라고요. 처음 학기에는 힘들었죠. 그때 독수리 5형제라고 나이가 비슷한 남자 3명과 여자 두 명이 뭉쳐 다녔는데 학기 말에 술 먹으면서 하소연을 했어요. 왜 내가 탈북자라고 차별하냐? 왜 나를 피하냐 그랬더니 한 명이 갑자기 당돌하게 우리가 피한 것이 아니라 형이 우릴 거부했다고 하더라고요. 집에 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나한테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누가 친절하게 하면 뭣 때문에 나에게 그러지? 날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고 경계를 했던 거예요.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아이들과 밥도 먹고 친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런 일이 있고나서는 4년 동안 좋았습니다.
남한생활 6개월 만에 대학입학을 합니다. 사회경험 거의 없이 바로 학생이 돼서 공부만 했던 건데요. 그는 남쪽에서 잠깐 했던 첫 번째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규민: 일당을 받아 하는 일일 노동자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벌었던 노임 받은 돈봉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침 8시에 나가서 5시면 끝나는 청소기 조립공장이었습니다. 일당을 받으면 3천원을 소개비로 주고 나머지를 받은 겁니다. 일당을 받아 가게 가서 쌀 한 포를 사서 집에 가져오니까 맘이 그렇게 흐뭇하더라고요. 한 달 동안은 절대 굶어 죽을 일이 없잖아요. 그리고 반찬 될 것을 샀는데 하루 일한 것을 가지고 쌀 한포를 사고 채소를 사고도 돈이 남았는데 한 달 동안 그것을 먹는데 너무 많아 힘들었습니다.
배농사를 짓겠다면 농촌에 갔던 청년은 마음을 고쳐먹고 대학진학을 해서 4년동안 영화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해서는 북한관련 상업영화 연출부에서 밑바닥부터 한편의 영화가 나오기 까지 모든 제작과정에 참여합니다. 그때 나온 영화가 남북한 분단상황을 소재로 만든 국경의 남쪽, 크로싱, 포화 속으로 등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남한생활 10년만에 입봉작 즉 감독으로 첫 작품이 ‘겨울나비입니다’. 황해도에서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영화한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김규민 감독의 영화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