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력을 갖추자

북한이탈주민 취업박람회에서 탈북자가 채용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취업박람회에서 탈북자가 채용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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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한에 간 탈북자들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 초기정착에 들어가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데요. 오늘은 남한정착 5년차가 된 40대 탈북여성 이현(가명)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양강도 출신으로 지난 2003년 탈북한 이현 씨는 친구의 말을 듣고 고향을 떠납니다.

이현: 친구가 중국에 봄철에는 고사리가 대단히 많은데 그 값이 비싸다. 한 달만 가서 고사리를 꺾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 떠났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죠.

날아오는 (북한)경비대의 총알을 피해 넘었던 두만강. 이 씨는 중국 땅을 밟는 순간 속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팔린 몸이 됐던 겁니다. 그렇게 중국에서는 7년을 살다가 2009년 또 한 번 운명을 길을 떠납니다.

이현: 처음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안도의 한숨이라고 할까? 이젠 살았구나 하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공민증이 있으니까 이젠 쫓기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그런 맘이었습니다. 대구에 집을 받았는데 어둑어둑해서 들어갔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막막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을 못하겠어요.

이 씨가 남한 땅에 도착한 것은 6월. 해가 길어서 저녁 7시가 넘어도 훤한 때였는데 대구 빈집에 도착했을 때는 마음이 추웠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낳은 7살 된 딸과 옷가지를 넣은 가방이 한 개. 가구가 없는 아파트에 남겨지면서 비로소 이게 현실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딸은 그때 기억을 말하곤 한답니다.

이현: 저의 아이는 중국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길림성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지금도 아이는 빈집에 돼지 저금통이 생각난다는 말을 하거든요. 처음 집에 갔을 때 도우미 아줌마가 청소를 해주고 나가면서 저금하고 잘살라는 의미에서 돼지 저금통을 놔두고 갔겠죠. 그런데 아이가 그걸 기억하는 거예요.

남한입국 탈북자들이 생활에 안정을 찾는 시기를 정착에 3년차 정도로 보는데요. 이 씨의 경우는 좀 빨랐습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던 탓도 있습니다.

이현: 그때 마음이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그 막막함을 하나센터에서 떨쳤어요. 아침에 나가서 사람들하고 교육받고 저녁에 들어와서 쉬고 다음날 아침에 또 나가고요. 그렇게 20일 하니까 금방 시간이 갔어요. 또 아이가 있으니까 마음을 잡을 수 있었죠.

기자: 어느 정도 지나니까 마음에 안정이 되던가요?

이현: 한 몇 달 갔어요.

기자: 잘 살아보자고 마음을 먹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이현: 살아보자는 계기는 어차피 남한에 왔으니 살아야 되잖아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센터 다니면서 직업훈련학교를 갔는데 전산학원이었어요. 그것을 보고 이걸 배우자 해서 직업훈련 받고 컴퓨터 교육받고요. 딴 생각을 할 생각은 없었죠.

기자: 먹고 살기위해 어떤 일을 해봤고 기억에 남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이현: 1년을 직업훈련을 받고 대구에서 고용노동부 탈북자 취업지원과에서 행정인턴으로 일했어요. 그때 내가 한국사회에서 첫 맨토라고 할 수 있는데 공무원이었어요. 그분이 하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내가 공무원이 될 수 있겠는가 했는데 거기 들어가서 일하다 보니까 나도 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계약이 끝나고 나올 때 내가 공부해서 공무원 시험을 보고 정식 직원이 되겠다 하니까 그분이 인생에 있어 꼭 백점을 맞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국가 기관에서 2년 정도를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 합니다. 서울에 와서는 또 교육기관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 중국어과 학생이기도 합니다.

이현: 아이 때문에 올라왔어요. 한국말을 못하는 상태에서 왔는데 학교에 가서는 학급 아이들에게 왕따를 많이 당했어요. 3년 쯤 지나 한국말을 하는데도 아이들 머리에는 중국에서 온 아이 라고 해서 왕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를 위해 신분을 감춰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서울로 갔어요. 그리고 서울에는 실력도 다른 아이들처럼 따라가면서 잘하고 있어요.

이 씨가 말한 왕따는 집단 따돌림이란 말입니다. 한국말을 잘 몰랐던 아이가 같은 반 아이들에게 놀림 꺼리가 됐던 겁니다. 다행히 서울로 이사를 와서는 우리말도 잘하고 하니까 더 이상 그런 문제는 없고 학교에 적응도 잘한다고 합니다. 이제 이 씨는 남한생활에 자신감이 있어 보입니다. 뭘 해도 될 것 같은 그런 자신감 말입니다.

이현: 지금은 행복해요. 어딜 가나 힘든 고비는 꼭 있는 것이고 그 고비를 넘기면 되는 거예요. 내가 노력하면 배울 수 있고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가 있으니까 행복해요.

기자: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요?

이현: 공공기관에서 자릴 잡고 제가 노동부에서 일하면서 결심한 것이 탈북자가 여기 와서 가고 싶은 곳에 전부 가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 사람들을 위해 적성에 맞는 좋은 일자리를 찾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지식을 갖춘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삽니다. 그리고 지식보다 나은 것은 지혜란 말이 있죠. 어려움 속에서도 슬기롭게 해쳐 나가려면 지혜가 필요한데요. 이 씨는 지혜보다 더 나은 경험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아는 이 없는 땅에서 출발한 새로운 인생에 대한 경험 말입니다. 그는 방송을 듣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줍니다.

이현: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을 해요. 알면서 잘 못 느끼는 데 정말로 공짜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요. 노력한 대가만 있고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거예요. 부단히 노력하고 배우면 인정받을 수 있다 말로 인정해 달라고 하지 말고 먼저 인정받을 수 있게 노력하자고 북한 사람에게 말하고 싶고 한국 분들에게는 북한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기 전에 진심을 열어주면 그 사람들이 다가 온다 그분들이 힘들다고 말할 때 뭔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하면서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주면 다가선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현(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