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하고 싶은 것은 너무도 많은데 생각처럼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사람 산다는 것이 나가서 이웃도 만나고 얘기고 나누고 하면서 지내야 사는 재미도 나는 것 아닐까요? 오늘은 남한생활 8년 차인 탈북여성 박희영(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희영: 너무도 아팠던, 지난날 너무도 많이 아파서 집에서 혼자 많이 울었고 슬퍼도 어디 나가서 말도 못하고 그랬는데...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하는 무산군 온천리 출신의 박희영 씨는 기자와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한을 풀어놓습니다.
박희영: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엄마 아빠가 많이 힘들어 했어요. 내가 한국에 올수 있었고 이렇게 사는 것을 엄마 아빠가 봤으면 참 기쁠 텐데 내가 혼자 와서 사는 것도 감사하고 이런 좋은 집에서 살고...
항상 부모님은 몸이 아픈 박 씨를 애처로워했습니다. 자신이 굶어도 딸에게는 먹을 것을 챙겨주려고 애쓰시던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박 씨는 의지할 곳을 잃게 됩니다.
박희영: 1997년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탈북 동기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같이 살다가 배급이 끊어져서 아버지가 굶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내가 혼자 살 수가 없었어요. 내 힘으로 살 수가 없었어요.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이렇게는 못 살겠다 중국이라도 가서 살아야겠다고 맘먹고 중국을 건너왔습니다.
기자: 그때가 몇 살이었나요?
박희영: 그때 29살이었습니다.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던 박 씨는 배급이 나올 때는 300g을 받았는데 배급도 끊기고 부모가 사망하자 더 이상 혼자 살수가 없었던 겁니다. 중국에서는 10년을 살게 되는데 그 중간에 한 번의 북송과 재탈북을 거쳐 한국에는 2006년에 도착합니다. 그가 말하는 중국 생활이란 이런 겁니다.
박희영: 저는 거기서 길바닥 돌보다 못하게 살았어요. 제가 중국 돈 4,500원에 팔렸어요. 처음엔 팔려온 것을 몰랐죠. 남편이 칼로 찌르고 때려 너무 맞아서 언제 유산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시어머니가 한 번 말하는 것이 ‘네가 여기서 아파서 죽어도 울어줄 사람 없고 맞아 죽어도 서러워 할 사람 없다. 네가 아들한테 맞기 싫으면 4,500원 주고 가라’ 그때 내가 팔려 왔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구나하는 것을 느꼈어요.
조선족 남편은 자기보다 나이가 2살 어렸는데 의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7년간 부부생활을 하면서 이유 없는 폭행을 당하면서도 참고 살수밖에 별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박희영: 부부간에 살다보면 싸울 때도 있고 하는데 도가 넘어가는 거예요. 머리를 잡고 바닥에 몇 십 번을 내리치는데 죽을 것 같았어요. 토할 것 같아서 그릇을 가져왔는데 핏덩어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아버지 엄마 생각하면서 너무 울었어요. 나를 혼자 남겨놓고, 혼자 어떻게 살라고 갔는가 하면서 울었어요.
두 번째 만난 조선족 남성과 살면서 한국에 가는 길이 열리게 됐고 2006년 중국을 떠나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됩니다.
박희영: 내가 진짜 여기를 왔는가? 중국 사람들도 쉽게 못 오는 한국에 왔는가? 이제는 여기서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살겠구나 했어요. 느낌이 너무 이상했어요.
박 씨가 남한에서 호구를 만든 후 국제결혼을 통해 5개월 뒤에는 중국에서 남편이 도착합니다. 다른 탈북자들은 하나원에서 남한사회 전반에 대해 기본교육을 받고 또 지역사회에 나가서도 하나센터란 곳에서 자기가 사는 곳에 대해 안내를 받는데 박 씨는 병원에 있어야했습니다. 몸이 안 좋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정착 8년이 되지만 사회경험은 하질 못했습니다.
박희영: 일을 해보려고 세차장에 갔어요. 그런데 너무 허리하고 다리가 아파하니까 사장님이 아줌마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고 하면 일 못합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일 못했어요.
기자: 8년 동안 딱 이틀 일한 경함한 것밖에는 없는 거네요.
박희영: 네.
기자: 학교나 교육기관에는 안 가보셨어요?
박희영: 그런 것을 하자 하니까 남편이 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다리가 많이 아파서 앉아 있으면 다리가 많이 부어요. 그러니까 아무데도 가지 말고 집에 있는 것이 나를 도와 주는 거다 해서 제가 아무데도 못 가봤어요.
매일 집에서만 생활을 하던 박 씨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친구는 한 가지 제안을 해옵니다. 함께 나들이를 가자는 겁니다. 놀러 가는 것이 아니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거라 했는데요.
박희영: 네가 아프지만 나하고 같이 안 가볼 꺼야? 환자들 있고 한데 가보자 했어요. 저는 그때까지 봉사단이란 말도 몰랐어요. 그런데 친구를 통해 가보니까 내가 크게는 도움을 못줘도 이 사람들을 통해 말할 수도 있고 나가서 웃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기자: 도와주시는 분들은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분들인가요?
박희영: 그냥 누워있는 장애인들이죠.
기자: 활동이 불편한데 봉사활동을 할 수 있습니까?
박희영: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하동복지관에도 나가는데 복지관에 가서도 어르신들 위해서 밑반찬을 하고 하는데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거예요. 한국에서 내가 큰 것은 아니라도 작은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한 거예요.
탈북자들이 남한에 가면 운전학원, 요리학원, 컴퓨터 학원과 같은 다양한 교육기관과 직원훈련 학교 등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정부가 교육비를 지원하면서 무료로 강의를 듣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건데요. 박 씨도 배우고 싶은 것이 정말 많은데 마음만 있고 몸이 따라주질 않아 답답하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박희영: 왜 이렇게 안 되지? 한국에 왔는데 왜 안 되지 ...그것이 속상한 겁니다. 약을 먹는데 한 10가지를 먹습니다. 약을 먹다보면 깜빡깜빡 할 때도 있고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몸이 안 따라 가는 겁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못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생각이 납니다. 중국에 있을 때 첫 번째 남편에게 묻고 싶어요. 죄도 없는 나한테 왜 그랬어요? 죄도 없는 나에게 왜 그랬어요?
너무 맞아서 몸이 상하고 마음이 속까지 전부 곪아 터져 이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하소연입니다. 너무나도 세상을 몰랐던 그리고 태어나길 병약하게 태어났던 속상함이 절절한데요. 이런 박 씨에게 소박한 바람은 봉사활동을 위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거랍니다.
박희영: 제가 꿈꾸는 것은 요리를 해보고 싶어요. 내 손으로 한 음식을 두고 맛있게 하는 구나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요. 이북에서 왔지만 한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음식도 똑같이 맛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희망은 절망을 딛고 일어선다는 말이 있죠. 지금은 안타까움으로 힘들어 하는 마음이 크지만 박희영 씨는 절대 좌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박희영: 이보다 힘든 북한에서도 살았는데 이제 한국에서 힘차게 보람 있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박희영(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