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자유라고 하면 이동의 자유, 거주의 자유, 언론의 자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쉽게 말해 원하는 것을 법의 테두리에서 마음껏 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남한에 간 탈북자들이 이런 자유를 누리는 형태도 다양한데요. 오늘은 여행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남한 사회에 정착한 탈북자 김혁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혁: 대한민국에 와서 자유를 여행을 통해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죠. 또 다니면서 느낀 것이 제가 받았던 정착금이 그렇게 큰돈은 아니고 이렇게 쓴다면 빨리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돈을 쓰고 나서 벌다 보니까 쓰긴 쉽지만 벌기는 정말 어렵구나 하는 것도 느꼈고요.
2000년 12월24일. 18세의 나이에 탈북한 김혁 씨는 현재 충청남도에 살고 있습니다. 고향이 함경북도 청진으로 한 번의 강제북송을 경험하고 북한 법 117조 1항. 비법 월경죄로 즉 도강죄로 3년형을 받고 수감 중 탈북을 맘먹게 됩니다.
김혁: 제가 16살에 감옥에 갔습니다. 중국을 왔다 갔다 하다가 북송당해 2000년 7월까지 회령에 있는 제 12 교화소인 전거리 교화소에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살아서 나가면 뭘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부모님이나 가족도 하나 없는 상태에서 중국에서 느꼈던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을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탈북해 몽골을 거쳐 김 씨가 남한에 간 것은 2002년 9월 14일. 김 씨는 그가 지나 온 날들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김혁: 남쪽에 와서 처음 한 일이 대한민국 사회를 느끼기 위해 여행을 다녔습니다. 제주도를 4번 왔다 갔다 했었고 서울, 강원도, 서해안, 울릉도 등 전국 여행을 다니며 당시 1천만 원을 썼습니다.
기자: 얼마를 여행 다니며 1천만 원을 썼다고요?
김혁: 3개월에 1천만 원을 썼습니다. 여행경비로 다 썼는데 비행기 많이 타고, 배도 타고, 한국 사회를 잘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버스 보다는 택시를 타고 가급적이면 배보다는 빠른 비행기를 많이 이용했습니다.
당시 정착금으로 받은 돈이 2천100만원. 2만 달러 정도 되는데요. 돈을 받아 쥐고는 700만원을 집 임대보증금으로 내고 400만원 가까이 되는 돈은 집 꾸리는데 썼습니다. 냉장고, 텔레비전, 침대를 사고 나머지 돈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석 달 만에 다 써버린 겁니다. 여행 경비로 쓴 남한 돈 1천만 원이면 미화로 환산해 9천 달러가 넘는 액수입니다.
김혁: 당시 돈의 가치를 잘 몰랐던 겁니다. 북한이나 중국에서의 돈 가치로만 판단을 한 겁니다. 제가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한 돈을 받은 겁니다. 1천만 원이란 돈이 그 숫자 때문에 내가 굉장히 부자로 생각 한 겁니다. 3개월 만에 다 써버리고는 일을 했습니다. 2002년 3월부터 새벽 4시 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아이스크림 회사에 다니면서 한 달에 6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두 가지 일을 더했습니다. 하루에 세 가지 일을 하면서 140만원을 벌었죠. 그리고 8개월 만에 병이 나서 입원을 했지만 다시 1천만 원을 만들었습니다.
한 달에 100만 원을 번다고 했을 때 입고 먹고 쓰지 않아도 10달이 되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을 단 3개월만에 다 쓰고는 또 그 돈을 만드는데 걸린 기간이 8개월이라.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둘 다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김 씨는 힘들게 일하다 얻은 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는 퇴원해서 직업전문학교에 다니며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3년 남짓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다가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합니다.
김혁: 당시 느낀 것이 서비스 업종이다 보니까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이 대화가 안 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남한 사람들 만나서 얘기 하면 다 알아듣는데 저는 중간에서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이해가 잘 안 되는 겁니다. 언어, 억양, 전문용어, 외래어 등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국문학을 공부하면 좋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3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 까지 잃고는 이 세상 혼자가 됐습니다. 하나 있던 형과도 헤어졌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소위 말하는 꽃제비 생활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김 씨에게 남한에서의 대학 공부는 정말 힘든 육체노동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김혁: 대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특히 교수님 말씀이 잘 이해가 안됐고 학생들 얘기도 잘 이해 안 돼서 섞이지도 못했고요. 그것을 극복한 것은 기숙사 생활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점이 형편이 없었습니다. 첫 학기엔 1.87를 받았습니다. 경고 수준이죠. 정부 등록금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점수가 너무 낮아 학비 지원이 안 된다고 해서 제가 통일부에 전화를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공부하고 싶어 대학에 왔는데 지원이 없으면 학교를 못 다닌다며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러면 한 학기만 도와주겠다고 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음 학기부터는 2.5를 넘었습니다.
서강대학교에서 ‘북한의 꽃제비에 관한 연구’란 제목으로 석사학위를 받게 되는 김혁 씨는 현재 충남지역 통일안보교육 강사로 활동하면서 통일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남한생활 10년이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몇 번 오간 끝에 안정을 되찾은 굴곡의 세월이라고 나름 정리하고 있습니다.
김혁: 인천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남한 사람들의 밝은 모습과 친절함을 느꼈을 때는 이곳이 천국이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북한의 폐쇄적인 생활에서 자란 저에겐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생활하는 과정에서 돈 벌로 다니면서 어렵고 약간의 사기도 당하면서 동경심이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도 만들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면서 다시 안 좋았던 생각이 변하면서 기대감이 상승합니다. 그래서 대학원 졸업이 가까워 오는 순간 다시 대한민국은 나에겐 천국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겁니다.
김혁 씨는 남북한을 모두 경험한 30대 청년으로 이제 앞으로 있을 통일된 날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혁: 저는 단기적인 측면에서는 일단 박사과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에 대비해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고 장기적으로 통일 이후에 함북도 도지사가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 함경북도 청진이 제 고향이니까 통일이 됐을 때 고향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것이 목표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충남에서 통일안보교육 강사로 활동하는 탈북자 김혁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사이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