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늦지 않아요

계명대 동산의료원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등 500명명이 환자를 섬기는 자세로 간호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섬김 간호 선서식'을 하고 있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등 500명명이 환자를 섬기는 자세로 간호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섬김 간호 선서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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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공부든 뭐든 다 때가 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또 맛있게 먹으려면 제철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최고의 성과 내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조건들이 맞아야 한다는 말인데요. 어느 연령 때가 남한생활에 제일 정착에 빠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답이 없어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50대 탈북여성 이순희(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북한에서 당원이었던 이 씨는 소위 말해 성분이 좋아서 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탈북 당시 주변 상황은 썩 좋지 못했습니다.

이순희: 제가 북한을 떠날 때가 2006년입니다. 그때 북한은 근로자의 급여가 500원이었는데 입쌀 한 키로가 700원이었어요.

몇 년간 중국생활을 거친 후 남한에 입국한 것은 무더운 여름날.

이순희: 제가 입국했을 때가 8월18일입니다. 판문점 도끼사건이 있었던 날입니다. 공항 텔레비전에서 보도를 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잊고 있던 사건인데 옛날에 벌어진 사건을 보도해서 기억하게 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공항의 모습이 멋있고 깨끗했습니다. 북한에는 순안공항뿐인데 여기 오니까 참 멋있다 그런 느낌을 받았고 시내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활기 있게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니 바쁘게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벌써 새로운 세상이 어떤 곳이구나 하는 감을 잡게 되는데요. 제일 먼저 만난 사람에게서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이순희: 제가 대구에 도착해서 동사무소에가 주민신고를 하려고 갔는데 담당형사님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는 겁니다. 북한에서는 경찰하면 공포의 대상인데 나한테 와서 예절 있게 존경어를 쓰는 것을 볼 때 내가 갑자기 높아진 것 같고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것에 마음에 안정이 됐죠. 우리를 보호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마음이었어요. 중국에서는 항상 경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여기는 내가 정착해 살 곳이구나. 경찰이 나를 보호해 주는구나 하는 심리적 안정을 찾게 됐습니다.

이제는 직업도 국가에서 지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안 이 씨는 일자리부터 찾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조차 힘든 노동을 안 해본 처지라 육체노동은 아니구나 하는 경험을 하게 되죠.

이순희: 자기 적성에 맞는 것을 찾는 것이 저는 좋았어요. 그냥 도전해 보자 하는 생각으로 대학식당에 취직을 했는데 일주일 하고 나선 너무 힘들었어요. 학생이 800명 되는 곳인데 식단이 매일 달랐어요.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겠다 생각하고 생활정보지를 보는데 간호조무사는 나이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식당일을 그만두고 간호조무사 학원을 1년 다녔어요. 공부하는 동안 나라에서 기초수급자라고 최저생계비를 지원해줘서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졸업하고 나서 바로 취직했어요.

전혀 경험이 없는 일을 하기 위해 간호조무사 학원을 찾았을 때 이 씨의 나이는 50살입니다. 학원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았고 대부분 학생의 연령대가 20대에서 30대였습니다. 배우는 것에도 그에 맞는 나이가 있는 법인데 한참을 지나 보이는 사람이 학원을 찾으니 이상한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순희: 그때는 간호 학원에 입학하기 전에 고용지원센터에 등록을 해야 돼요. 하는데 나이가 있다고 누구나 학원에 무상으로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녜요.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탈북자라고 했더니 담당자를 소개해주는 거예요. 담당자가 열심히 공부하세요 하면서 수속을 밟아주는 겁니다. 학교에 가니 제가 나이가 젤 많았어요. 원장이 그 나이에 공부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나이가 걱정됐나 봐요. 그래서 입학만 시켜주세요 그러면 열심히 할 겁니다. 그랬어요.

무사히 과정을 마치고 새로운 직장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또 남는 시간에는 야간대학을 다녀 올해 졸업반에 있습니다. 직장도 공부하기 좋은 곳으로 옮긴 상태고요.

이순희: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할 때는 3교대로 일하면서 밤 근무를 해야 해요. 그런데 요양원에서 하는 일은 병원일과 똑같은데 밤일이 없어요. 그래서 대학 공부하기에 지장이 없기에 요양원으로 옮긴 겁니다.

남한 텔레비전 광고 중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까 더운 여름날 시원한 곳으로 가서 좀 쉬다 오라는 내용인데요. 이 씨도 시원한 곳을 찾았답니다.

이순희: 남한은 7월과 8월이면 휴가철입니다. 가족끼리 계획을 세워서 바닷가라든가 해외로 가는 겁니다. 오늘도 보도를 보니 인천공항을 통해 9만 명이 해외로 출국했다 하더라고요. 저는 갑자기 해외로 가긴 시간이 안돼서 차가 있는 친구와 계곡을 다녀왔어요. 가니까 물이 너무 맑아서 물 안이 다보이고 가족끼리 와서 텐트를 치고 놀고 정자에 음식을 차려놓고 먹고 하는 모습이 너무 즐겁게 보였어요.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메밀국수집이 있어서 고향생각하면서 시원하게 메밀국수를 먹고 왔습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활동을 하면서 뭔가 의미도 찾고 싶은 이 씨 앞으로는 더 뜻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순희: 어르신들이 노후를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 주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다. 통일이 되면 이북에 가서 이런 사회복지를 하고 싶어요. 남한처럼 북한에 요양보호시설을 꾸미고 힘들게 어렵게 사는 분들을 모시고 사업을 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남한의 경험을 살려서 이런 사업을 해서 남한의 복지를 북한주민도 함께 누리는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순희(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