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인생을 살아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로비에서 열린 '수선화의 날' 행사에서 심영목 암병원장(왼쪽)과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암환자와 가족들에게 수선화 화분을 나눠주고 있다.  희망과 소생의 상징인 수선화를 암환자들에게 나눠주며 암극복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수선화의 날' 행사는 세계 여러나라에서 보편화돼 있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로비에서 열린 '수선화의 날' 행사에서 심영목 암병원장(왼쪽)과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암환자와 가족들에게 수선화 화분을 나눠주고 있다. 희망과 소생의 상징인 수선화를 암환자들에게 나눠주며 암극복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수선화의 날' 행사는 세계 여러나라에서 보편화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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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세 번째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이 첫 번째고 사선을 넘어 탈북을 한 것이 두 번째 그리고 남한에서 암치료를 받아 새 생명을 얻은 것이 세 번째입니다. 오늘은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는 탈북여성 최에바(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에바: 내가 건강해야만 건강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원봉사도 할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 천주교 세려를 받아 이름을 개명한 에바 씨는 조만간 방사선 치료를 끝내고 약물 치료에 들어갑니다. 앞으로 5년 안에 암이 재발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 있는데요. 에바 씨가 두만강을 건넌 것은 지난 1999년입니다.

에바: 북한에서부터 나쁜 남자들에게 납치돼서 중국에 넘어오게 됐어요.

그러면 탈북의사가 없었다는 말인가요?

에바: 그렇기 때문에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북한에서 일자리를 찾으려고 함경북도에서 혜산에 왔어요. 당시는 국경연선에 안 살았기 때문에 중국이나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우리 부대가 해산되는 바람에 혜산에 일자리를 찾아왔다가 나쁜 사람들에게 납치됐는데 당시는 탈북이 내 의견이 아니었잖아요. 중국에선 6일만에 중국공안에 잡혔어요.

마흔 살에 북한 땅을 떠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삶이 이어지는데요.

에바: 중국에서 만 6년을 살면서 그때 당시만 해도 한국으로 가면 영원히 아이들과 갈라진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 다시 북한으로 간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죠.

두 번의 탈북과 북송 그리고 세 번째 탈북에 성공해 남한으로 가는 선을 찾아 신변안전을 보장받는 남한에 도착합니다.

에바: 제일 좋았던 것이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이 좋았어요. 어떤 기준과 틀에 메여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나이에 컴퓨터 학원에서 배울 수 있었고 4년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죠. 제가 광주에 있을 때 2년제 공부를 시작했는데 하다보니까 재밌더라고요. 자본주의 사회를 더 알게 되고요. 그래서 4년제 편입을 해서 호남대학에 가서 사회복지와 보육교사를 전공했어요.

기자: 대학 졸업을 하고 일을 하셨나요?

에바: 작년에 졸업해서 4월에 장애인복지관에 취업해 일했어요. 그때 암이 있는 줄 모르고 일했는데 한 번 기절을 했어요. 아무래도 몸이 안 좋아서 검진을 받았는데 암이었어요. 그래서 일을 그만뒀어요.

남한생활도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뒤돌아보면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멈추면 넘어지는 굴렁쇠처럼 하루 24시간 쉼 없어 달렸답니다.

에바: 난 한국에서 지금까지 10년 살면서 휴식은 지금 병원에 있는 이 시간이에요. 2007년 4월 집을 받아서 일주일만 집에 있었지 닥치는 데로 일했어요. 과일 철에는 배꽃 싸는 일, 감 따는 일, 식당에서 그릇도 씻고, 웨딩홀에서 3년 일했어요. 대학 다닐 때 월요일부터 금요일은 학교 공부를 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인터넷에서 알바를 찾아서 일하고요. 6개월은 컴퓨터 학원 다니고 9개월은 미용학원 다니면서 그때 주말이면 일을 하고 노인정도 가고요. 닥치는 데로 일을 했는데 주말에만 일했어요. 주중에는 뭐든 배우려고 했고요. 고용지원센터에서도 주부프로그램이 있으면 가서 배웠어요.

너무 건강을 돌보지 않고 앞만 보고 욕심내 달려서 몸이 고장이 난 것일까요?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울까? 무슨 일을 하면 돈을 벌까? 정신없이 달려오다 덜커덩 이런 날벼락이 있을까? 내가 죽음의 병이라는 암에 걸리다니!

에바: 내가 만약 북한에서 암에 걸렸더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다행한 것은 남한에는 저소득 주민은 국민의료보험이란 제도가 있어 나라에서 병을 치료해 준다는 겁니다. 특히 탈북자는 그런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에바: 환자를 세심하게 관찰해요. 예를 들어서 아침에 뭘 먹었는지 물어보고 대변을 본사람 안본사람 알아보고 회진을 할 때 선생님이 환자의 얼굴도 살펴보고 간호사가 혈관주사를 못 놔서 자꾸 찌르면 간호사들이 먼저 기술이 부족해 우리에게 고통을 줬다고 미안하다고 먼저 표현을 하기 때문에 환자들은 괜찮다며 서로 생각해 주는 말이 오고 가거든요.

2015년 수술을 받고 현재는 부산의 메리놀 병원에서 방사선 입원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의 심신상태를 고려해 영화감상 시간을 준비한다든가 요일을 정해 외부인사를 초빙해 좋은 이야기 또 재미난 이야기로 환자를 웃게 하는 등 세심한 배려가 있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에바 씨는 말합니다. 빨리 건강을 회복해 자신이 받은 고마움을 다시 봉사로 예전에 하던 것처럼 돌려주고 싶다고 합니다.

에바: 남한에서 우리가 받은 것이 많으니까 나름대로 내가 미용자격증이 있으니까 노인정에 대학공부를 하면서 한 달에 두 번 복지관에 가서 머리 깎는 봉사를 했어요. 그때가 제일 보람 있었어요. 어르신들이 머리깍으로 와서는 말투를 보고 경상도에서 왔는가? 했는데 북에서 왔다니까 어르신들이 반가워하면서 격려를 해주는 데 어르신들의 그 말 한마디에 감동을 먹었어요. 우리는 당연히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일에 어르신들이 감사해 하면서 그렇게 칭찬을 많이 해주더라고요.

자신이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는 세상에 살면서 열심히 사는 데 왜 자신에게 시련이 닥쳤는지 때론 이상한 맘이 들기도 합니다. 북한에서 힘들게 살아서 인지 아니면 중국에서 너무 맘 졸이고 살아서 암에 걸렸던 것인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인 것을 에바 씨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의 시간은 덤으로 얻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값지게 살 것이라 다짐합니다.

에바: 암에 걸려보니까 인생이 별거 없더라고요. 그냥 물 흐르는 데로 좋은 생각만 가지고 뭔가 남의 것을 빼앗기 보다는 나누고 돈이 없으면 몸으로 봉사를 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암치료를 받으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최에바(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