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둘 꽃다운 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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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세상에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청춘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한에서 꼬마 때 탈북해서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탈북 여대생 이지연(가명) 씨인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7년차인 이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지연: 그때 6월이었는데 시골에서 살았어요. 좀 많이 가난 했어요. 제가 풀 뜯으러 다니고 온종일 감자 캐서 껍질 벗기고 그랬어요.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인 이지연 씨가 고향을 떠난 것은 2004년 여름입니다. 이 씨가 기억하는 시골 여름은 먹고 사는 것이 제일 어려울 때인데요. 가을이면 알곡이 나오니까 괜찮지만 가을이 되기까지 참 배가고픈 때입니다. 이 씨가 중국에서 지금 사는 남한으로 가기까지 2년이 걸립니다.

이지연: 길을 못 찾아 헤맨 것은 아니고 원래 중국에서 살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안전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남한에 가면 안전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해서 남한행을 선택하게 된 거죠.

기자: 2004년 탈북 당시 중국에서 살 생각으로 간 겁니까?

이지연: 네, 저희 엄마도 그때 중국에서 재혼을 한 상태시고 하니까 중국에서 살려고 저를 데리고 간 거죠.

기자: 그때가 몇 살이었나요?

이지연: 그때 13살이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두 살을 늦게 학교에 들어갔던 이 씨는 탈북했을 때 겨우 한글을 깨쳤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남한에서 학교에 가 공부한다는 것이 쉽진 않았습니다.

이지연: 한글 읽는 것이 힘들었어요. 남들보다 읽는 속도도 느리고요. 같은 한국어를 쓴다고는 하지만 문법도 다르고 해서 다시 배웠어요. 대안학교 다니다 다시 남한 일반학교를 다니고 싶어서 1년 정도 공부했는데 어린 아이들과 공부하는데 그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하면 모를까 그런데 잘 못하고 하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자기보다 2-3살 어린 아이들과 공부하게 됐는데 키가 작아서 먼저 나이를 말하기 전에는 북에서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하게 학교 급우들이 이 씨가 탈북자란 것을 알게 됐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전교생에게 퍼졌습니다.

이지연: 그 친구들이 어리고 부모님이나 언론에서 하는 말만 믿으니까 북한에 대한 생각이 나빴습니다. 저한테 북한에서는 폭탄을 매일 만드냐? 뭐 이런 것만 물어보고요. 진심으로 저를 알고자 했던 것이 아니고 사회에서 주는 북한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저를 순수하게 못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북한에서 왔고 하니까 일반 남한 친구들 보다는 얼굴이 까맣고 사투리도 쓰고 얼굴도 어두웠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저를 보고 무섭다고 했어요. 가까이 하기 싫어하는 친구였던 것 같아요. 그때 저희 모습을 보면...

정규 교육과정인 일반학교를 나와 1년 만에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끝냈습니다. 시험은 통과 했지만 부족함을 느끼고 1년을 혼자 공부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공부방도 가고 대안학교 야학도 가고 열심히 하다 보니 실력은 늘었고 남한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20살 나이에 맞춰 이 씨도 대학에 갑니다. 이제 2학년이 됐는데요. 1학년 때는 조급한 마음이 있었지만 이젠 마음이 느긋해졌습니다.

이지연: 1학년 때 성적 잘나왔어요. 왜냐하면 공부만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것은 있어요. 대학교는 글을 많이 쓰잖아요. 그러자면 기본 지식이 많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까 글 쓰는 시험에서는 학점이 좀 낮았습니다. 교수님을 이론상으로 근거를 대면서 설득해야 하는데 저는 결론만 찬성합니다. 반대합니다. 이런 식이니까요. 책을 많이 읽고 있어요. 남한 학생들이 많이 읽는 고전도 읽고 기사도 많이 보고요. 지금 현재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전에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인생을 즐겁게 살자는 마음이었는데 이젠 저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제가 잘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남한생활 7년동안 공부만 했기 때문에 특별히 말할 수 있는 사회생활이란 것이 없는데 딱 한 번 시간제 일을 한 것이 이 씨를 조금은 더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이지연: 학교 다닐 때 돈이 좀 필요했었어요. 광고를 종이에 적어서 길에 서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는데요. 시간당 4천 200원을 받으면서 일했는데요. 사람들이 그냥 많이 지나치는데 저는 저를 무시한다는 것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계속 하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저한테 많이 도움이 됐어요.

남한에서 청소년기를 지냈기 때문에 이제 북한식 말투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냥 있으면 아무도 고향이 북한이란 것을 모릅니다. 이 씨는 남한에서의 스물두 살 나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지연: 외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두는 것 같습니다. 여자의 스물두 살은 한창 꽃필 나이잔하요. 앞으로의 꿈이나 방향성에도 생각을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나 이성이 좀 더 나를 좋게 보면 좋겠고 많은 사람이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아니죠. 저도 그렇죠. 저도 스물 둘이잖아요.

매일 행복을 느끼고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문득 문득 내가 만약 남한이 아닌 북한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는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이지연: 밥을 배불리 먹고 힘들어할 때 배가 아파서 누워서 괜히 많이 먹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북한에 있으면 이런 생각을 못했을 텐데 이런 마음이들 때 탈북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또 북한에서 직업을 선택하고 뭔가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는데 꿈을 선택하고 고민한다는 자체가 행복한 것 같아요. 꿈을 그리고 세계로 뻗어나가서 뭘 할 수 있다는 것 ,노력하면 뭐든 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탈북을 잘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 여대생 이지연(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