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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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만 해도 먹고 살길을 찾아 무작정 도강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탈북이 식량난 또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란 말은 사라졌고 살기 좋은 환경을 찾아 또는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남한행을 결심했다는 얘기를 쉽게 듣게 됩니다. 오늘은 탈북여성 허인정(가명) 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허인정: 중국에서 조선족 신랑을 만났습니다. 남편이 한국에 와서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시부모님이 중국서 오셔서 같이 저녁에 선선할 때 바닷가에 가서 고기잡이 했거든요.

함경북도 출신의 허 씨는 남편 가족이 중국에서 한국을 방문해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탈북해서 중국에서는 남편보다 시부모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더 반가웠는데요.

허인정: 이 사람하고는 두 달 같이 있고 거기서 시부모와 4개월을 같이 있다가 그 다음에 한국에 오라하더라고요. 아이들도 데려올 수 있다고 해서 북한의 현실과 여기를 놓고 보니까 나도 거기서 사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오긴 왔는데 자식들 생각하면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보통은 탈북여성이 남한에 가서 중국에 있는 조선족 남편을 국제결혼의 형식으로 초청 하는데 허 씨의 경우는 남편이 먼저 한국에 가서 일하고 있었고 나중에 허 씨를 오라 한 경우입니다. 허 씨가 두만강을 건넌 목적은 자녀교육 때문이었습니다.

허인정: 북한에서 올 때는 자식이 둘이 있는데 아들이 군대 가서 대학 추천을 받았는데 외할아버지가 외국출신이라 그것을 해명하고자 할 수 없이 중국에 와서만 할 수 있기에 왔는데 중국에 와서 북한의 현실을 알게 됐고... 저는 온지 2년밖에 안됐어요. 북에 있을 때는 김정은 체제였는데 제가 있을 때는 김일성 시대처럼 백성들의 아픔을 다 해결해주는 줄 알았는데 오고 보니까 자기 고모부도 처형을 하고 하는 것을 보니까 내가 정말 거기서 어떻게 있었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북에 살 때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북한체제에서 들려주는 말이 전부인줄 알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외부 세상에 나와 다양한 뉴스를 접하고 나니 혼란스러웠던 겁니다. 특히 자신이 알고 있던 남한사회는 전혀 달랐습니다. 북한에서 알던 것과는 정반대였던 겁니다.

허인정: 대사관 올 때까지도 우리에게 정착금을 주는 것도 몰랐고 아파트를 주는 것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정착금 주지? 우리가 살 수 있게 집도 주지 또 6개월 동안 기초수급자로 생활비 지원하지 앓으면 병원가라고 5년은 무료입니다. 처음에 형사가 붙을 때는 내가 감시받는가? 그런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우리가 뭐 잘못될세라 돌봐주고 하는데 이게 자본주의 맞는가 싶더라고요. 어찌 보면 사회주의 같은 감을 준다고 난 말합니다. 내가 50년을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다보니 아직 여길 잘 모릅니다. 돈 없으면 굶어 죽는 줄 알았는데 내가 맘먹은 데로 할 수 있거든요.

허 씨는 중국에서 제 3국을 거쳐 남한으로 갑니다. 그리고 남한입국 과정에서 만난 해외 공관 사람들에게서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허 씨는 새롭게 펼쳐질 제2의 인생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허인정: 대사관에 도착한 순간부터 얼마나 가슴이 뜨겁든지. 라오스 한국 대사관에서 두 달을 있었는데 얼마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지 이전 우리 사회주의에서 느꼈던 그런 따뜻한 마음을 느꼈어요. 자본주의하면 오직 나 하나, 돈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뭣이 따뜻한가하면 한민족이란 것만으로 우릴 받아주고 보호해주고 하나부터 열까지 생활필수품을 챙겨주면서 우리에게 불편이 있을까봐 그렇게 따뜻하게 해주더라고요. 북한에서는 땍땍거리고 그런 것이 많은데 누구에게나 존칭을 붙여주고 알뜰하게 대해주더란 말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대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탈북자가 남한에 입국하면 초기정착 6개월은 정부에서 기초생활에 필요한 생활비 지원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허 씨도 곧 남한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데요.

허인정: 지금 피부미용을 하는데 북한에서는 기계 공부를 한 기계 기사거든요. 여기서 생판 다른 일을 하는데 와 보니까 생각하든 것과 판이해요. 북한에서는 자본주의는 사람 못 살 곳으로 생각했거든요. 북한에서는 장사를 하자고 해도 여러 곳에 뇌물을 써야 하거든요. 내가 북한에서 하던 것만큼 하면 1등 부자가 되겠습니다. 나는 북한에 있을 대도 아이들 대학공부 시키자고 장사하면서 몇 시간을 못 잤거든요. 여기서는 아무리 일을 해도 힘든 것을 모르겠어요.

일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자격증을 따고 자기 가게를 차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일하는 만큼 벌이는 되니 노후를 위한 저축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나보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 즉 노인이나 고아들이 사는 곳을 방문해 봉사를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게 됐다는 겁니다.

허인정: 하나원에서 있을 때 책자를 통해 지금 내가 참가하는 봉사단 단장님을 알았는데 나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고 힘든 사람을 위해 뭔가 하면 좋겠다 했지요. 제가 여기 와서 발관리 자격증, 피부미용사 자격증을 땄거든요. 지금은 발관리 일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보통 9시까지 일해요. 할수록 재밌고요. 주말에는 봉사단체서 봉사하면서 열심히 살아보려고요.

이제 허 씨의 소원은 딱 하나 북한에 살고 있는 가족을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자면 통일이 돼야 하겠는데. 언제가 될 지 알 수 없지만 그날을 소망하며 충실히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허인정: 즐겁기도 하고 또 한순간에 자식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북한에서 알던 세상과는 너무 다르거든요. 북한 탈북민들이 여기 발전에 하나 보텐 것이 없는데 우리에게 힘을 주고 하는 것이 정말 고맙습니다. 아들, 딸이 오면 좋지만 못 온다 해도 난 통일이 꼭 된다고 믿으니까 내가 잘돼서 사회주의보다 인간미가 넘치는 곳이란 것을 말해줄 수 있도록 이 사회에 잘 정착할 겁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허인정(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