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또는 큰 부자가 되고 싶다 등 사람들은 누구나 제각기 작은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당장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는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9년차가 되는 박요셉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박요셉: 저는 장사를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옷 장사도 하고 집에서 농사도 짓고 그러면서 살았고...
올해 서른 세 살의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박요셉 씨. 북한에서 1997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합니다.
박요셉: 졸업하고 아버지에게 제가 장사를 하겠다고 하고 내가 나가 장사를 하면서 돈 벌어서 식량을 마련하겠다고 하고 1년을 황해도, 평안도를 돌아다니면서 쌀도 사고, 옷도 팔고 북한을 나올 때는 그정도 상황이었죠.
기자: 먹을 게 없어 아사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장사가 됐나요?
박요셉: 아사자가 발생하니까 쌀이 없잖아요. 배급이 안 나오니까 쌀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은 장마당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쌀 구입하러 장마당에 나오죠. 중국은 멀고 하니까 옷은 값이 비싸고 하니까 저는 옷을 중국 쪽에서 싸게 사서 남쪽으로 가서 팔고 쌀을 사서 북쪽으로 와서 팔았죠. 그 차액으로 옥수수를 사오고 일명 ‘행방’ 또는 ‘달리기’라고 하는 데 그 일을 1년 했습니다. 어머니가 가만히 앉아 있는 똑똑한 놈보다 돌아다니는 바보가 낫다는 말을 했는데 돌아다니다 보니까 사회가 보이고 내가 이곳에서 과연 내가 꾸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감도 들고 지금 하는 방식으로 중국에서 사업을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겠다는 환상을 가졌죠.
기자: 그리고 탈북한 건가요?
박요셉: 네, 99년에 탈북 했습니다.
기자: 탈북하면 반역자가 된다는 그런 두려움은 없었나요?
박요셉: 있었죠. 그런데 제가 97년에 탈북을 하다가 잡혔어요. 아는 동생이랑 잡혔는데 국경경비대에서 마을 보위부로 이송 됐는데 그때 하도 탈북자가 많다 보니까 감옥이 넘쳐 나는 거예요. 그리고 저희를 군 보위부까지 데려가야 하는데 시골 보위원들은 귀찮았던 거였죠. 막 거짓말을 했더니 탈북하지 말라고 하면서 놔 줬어요. 그런 경험이 있었죠. 탈북자가 많아 예전과 같이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고 그런 것이 없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출했던 거죠. 중국에서 돈을 벌어 돌아간다는 생각으로요.
중국에서는 불법 체류자로 숨어 지내야 했고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 생각처럼 돈을 벌어 고향집으로 가자는 것은 환상이었습니다. 월급도 받지 못하면서 일해야 했고 겨우 먹는 것과 잠자리만 해결이 되는 상태에서도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중국어를 짬짬이 공부했습니다. 그 덕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될 즈음에는 조선족인양 위장하고 좀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말 남한으로 갑니다.
박요셉: 남한생활은 저에게 너무 좋았어요. 북한에서 제가 만약 김일성 종합대학이나 김책공업종합대학을 가려고 하면 갈 수가 없어요. 우리 집안이 백두산 줄기도 아니고 여러 문제가 있는데 남한에 와서 대학 그것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닌 것이 큰 축복인 것 같고요. 제가 여기서 6년제 대학을 나왔는데 휴학까지 합하면 7년을 다녔어요. 졸업하면서 계산을 해봤는데 등록금, 생활비 기타 장학금을 합하니까 1억 5천만 원이 넘더라고요.
1억5천만 원이면 미화로 13만 달러 정도 되는데요. 박 씨가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탈북 청년 대학생인데 7년 동안 정부와 민간에서 지원을 받은 겁니다. 탈북자였기 때문이죠. 그렇게 수의학과를 졸업하고는 사업을 준비 중인데요.
박요셉: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는 것이 수의학과를 졸업하면 동물병원이나 아니면 동물관련 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수의사로 일하는 사람은 15%정도밖에 안돼요. 나머지 85%는 다른 곳에서 일하거든요. 검역원도 있고 인천공항도 있고 그리고 제약회사, 사료회사, 병원 등 분야가 다양하죠. 그런데 저가 하고 싶은 일은 북한개발이예요. 북한을 개발하려면 수의학적인 지식도 필요하지만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이 연결 돼서 그 지역사회에서 발전이 이뤄져서 하는 종합예술 같은 것이라 전공인 수의학적인 것들은 잠깐 보류하고 무역으로 개발사업을 해보려고 준비 중입니다.
단순히 경제생활을 위해 탈북을 해서 중국에서의 5년 생활 그리고 남한에서 9년을 살며 박 씨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남쪽에서는 한 것도 아무것도 없고 그냥 대학만 다녔는데도 10만 달러 이상 썼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제는 대학을 졸업했으니 그동안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박요셉: 제가 북한에서 가졌던 꿈이랑 지금 제가 가진 꿈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북한에서 중국으로 갈 때 꿈은 내가 성공해서 내가 우리가족에게 부를 안겨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도 내가 성공해서 좀 잘살아 보자는 꿈이 있었는데 지금 제가 꾸는 꿈들은 어떻게 하면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의 눈에서 어떻게 하면 웃음이 보이게 할까 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앞으로 10년?, 20년? 언제 제가 다시 고향땅을 밟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분들에게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서 그분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훗날 북한으로 가서 북한사회를 개발하는데 디딤돌이 되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청년 박요셉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