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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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잘 성장해주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을 겁니다. 항상 자식 생각에 부모는 아무리 힘든 앞길이 펼쳐진다 해도 마다하지 않는데요. 그래서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란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세 아이의 엄마인 탈북여성 이유희(가명)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유희: 아무 보호가 없잖아요. 저는 혜택이 하나도 없어요.

탈북자는 남한에 가면 5년동안 특별보호대상자가 돼서 정착금을 포함해 정부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함경북도 출신의 이 씨는 비보호 대상자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씨가 중국에 살면서 몇 년 전 한국을 잠시 다녀간 적이 있는데 그때 탈북자임을 밝히지 않았고 그로부터 1년 이상 시간이 흘러버린 탓입니다.

이유희: (북한에서의 교육 때문에)한국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어요. 텔레비젼를 봐도 드라마니까 꾸며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12년 한국에 와보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이렇게 부드럽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중국에도 내 집이 없고 친척도 없고 가진 것이 없으니 남한에 오면 집도 생기고 하니까.

이 씨가 탈북한 것은 지난 1999년으로 지난해 한국에 가기까지 중국에서 살았습니다. 조선족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았고 계속 중국에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마음이 바뀐 겁니다. 북한에서 귀가 아프게 들었던 남한이 가난하고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던 겁니다. 중국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었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자녀교육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든 거죠.

이유희: 일하다가 돌아갈 수 있는 3년 비자를 중국서 받아 왔어요. 나와서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이 데리고 나와서 돈을 벌자 하니까 아이를 어린이 집에 맡겨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많이 들었어요. 돈을 벌어 돌아가자 해도 안 될 것 같고 중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자 해도 힘들고 중국에서도 탈북자인 것을 숨기고 살았기 때문에 자수하긴 싫었지만 여기서는 돌 지난 아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더라고요.

탈북자뿐만 아니라 연변에 사는 조선족 분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중국에 송금하는 일을 쉽게 봅니다. 한국의 인건비가 중국보다 높고 또 남한의 돈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 몇 년 열심히 일해 저축하면 고향에 돌아가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들 합니다. 이 씨도 그럴 맘이었는데 막상 한국에 가보니 또 상황이 만만치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탈북자라고 자신신고를 했던 거죠. 이 씨는 하나원을 거쳐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다른 북한출신이 받는 지원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국국민으로 소득이 적은 사람을 위한 지원을 받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유희: 시청하고 여러 곳에서 많이 신경을 써주시고 있고 기초수급자로 110만원이 나와요. 부업을 해야 하는데 일을 하면 기초수급자 혜택을 못 받아서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찾는데 어렵네요.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돼서 받는 금액은 미화로 계산해 한 달에 천 달러 정도 됩니다. 현재 이 씨는 자녀 둘을 데리고 거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지역사회에서 제공하는 시설에 살고 있습니다. 남한에서 이런 곳을 쉼터라고 부릅니다. 보통 3개월 안에 살 곳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씨의 경우는 탈북자이고 아이가 있는 상황을 감안해 사정을 봐줘서 기간을 훌쩍 넘기고 있습니다.

이유희: 지금 여기 쉼터에 있으니까 집세 전기세, 반찬도 안 사니까 괜찮은데 밖에 나가서도 그돈 가지고 아껴 쓰면 되긴 하는데 저축을 못하잖아요. 나가서 벌어야죠. 그런데 아이가 두 돌이 안됐고 둘째가 오면 공부를 봐줘야 하니까 힘들죠. 그래도 부업을 하면 한 달에 40만원은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170만 원 정도 될 것 같고 한 50만 원 정도는 저축이 될 것 같아요.

북한에서 바로 남한에 간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생활을 오래 했지만 이 씨에게 남한생활이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유희: 힘든 것이 언어하고 자신감이에요. 중국에서도 똑똑하다고 하고 말 잘한다는 소리 들었는데 여기 와서는 말이 안 통하더라고요. 억양이 우선 다르잖아요. 저희는 말이 센데 여기는 부드럽게 말하잖아요. 어디를 가도 자신감이 없어 처음에는 말을 내뱉는데 말끝을 잇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움칫하고 옆에 사람 쳐다보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지금도 한국 사람들 보면 무서워요.

기자: 북한에서 바로 온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16년을 살았는데 그래도 힘든가요?

이유희: 북에서 바로 온 사람들은 핸드폰 기능을 익히는데도 보름 한 달씩 가고 밖에 가서도 말을 잘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남북한 말이 같은데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이 뭘 말하는지 청취자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볼까요?

이유희: 욕을 먹었어요. 핸드폰 가게에 갔는데 사장님이 하는 말을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할인이요 할부요 그러는데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그 사장님이 주는 것을 샀더니 비싼 것을 샀더라고요.

이 씨에게 걱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직 중국에 있는 큰아들을 데려오는 문제입니다. 다행히 중국에 호구가 있기 때문에 오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는데 와서가 걱정입니다.

이유희: 저는 중국에서 애들에게 조선족으로 말했어요. 아이가 중국 장춘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하루는 자기반에 북한아이가 왔는데 어떻다는 둥 하면서 자꾸 깔보는 말을 심하게 해서 놀랬어요. 그래서 내가 탈북자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움츠러들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도 내가 탈북자란 것을 아이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어요. 그땐 중국에 살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가 이제 한국에 오면 말을 해야 하는데...

먹고 살길을 찾아 떠난 것이 탈북이었다면 중국에서 한국으로 간 것은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엄마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힘차게 살아보리라 자신을 토닥거려봅니다.

이유희: 국민임대주택 신청을 하려고 했는데 보증금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 하나센터 선생님이 알려줬는데 전세임대란 것을 알았어요. 국가에서 1천만 원부터 8천만 원까지 대출을 해주는 겁니다. 그것에 5%는 본인이 부담하고 이자를 내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어서 제가 신청을 해놓고 있습니다. 9월이 되면 집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어요. 당첨이 되면 제가 집을 찾아서 갈 수 있죠.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유희(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