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상이 돼서 세계로

사진은 부산 감만부두.
사진은 부산 감만부두.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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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신라시대에는 장보고 장군이 있어서 해상권을 장악하고 동방 국제무역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이제 시대가 변한만큼 바닷길을 이용하던 아니면 그것이 하늘길이든 무역을 하면서 세계로 뻗어나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4년차가 되는 이명훈(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명훈: 우리 탈북청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시작을 했죠.

함경북도 온성 출신의 이명훈 씨는 기자와 전화통화를 한 날에도 탈북청년 45명이 모여서 노래를 통해 한반도 통일과 북한 인권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씨는 북한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잠시 집에 와서는 복귀하지 않고 남한행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명훈: 여기는 휴가가 정해 있어서 쓸 수 있는데 저는 부대 물자구입이라고 해서 부족한 돈이나 건설자재를 가져오라고 해서 제가 휴가를 왔었어요. 당시 군에 가서 김일성 사상에 대해 엄청 교육이 돼있어서 많이 떨렸는데 다시 가면 굶주리고 힘드니까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더라고요.

17살에 군에 입대해 6년만에 처음 집엘 가봤다는 이 씨는 먼저 탈북해 남한에 정착한 누나의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넘습니다. 보통 탈북자가 남한에 가면 첫해는 북한과 너무 다른 세상에 혼이 나가서 흘려보내고 두 번째 해에는 이제 좀 남한생활에 적응이 됐다 싶어 취업을 위해 직업훈련학교도 다니고 학교도 다니면서 지나가고 3년차 정도가 돼야 비로소 현실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온다고들 하는데 이 씨의 경우는 누나의 도움으로 시행착오의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이명훈: 1년도 안돼서 6개월 준비하고 다음해에 대학에 들어갔어요. 군 생활 얘기를 많이 하죠. 한국은 2년이지만 저는 6년을 하다가 왔거든요. 아이들이 저에게 대단하다고 말하더라고요. 한국 군대 얘기를 들어보고 저도 들려주고 하는데 공감대 형성이 되더라고요. 말이 통하더라고요.

기자: 한국 군대 얘기 들어보면 어떻던가요?

이명훈: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죠. 한국 군은 솔직히 하루 세끼 배불리 먹으면서 군복무를 하고 월급 타서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사먹을 수 있는데 저는 한 끼 감자 세알 씩 먹으면서 군복무를 했어요. 식량이 부족하다 보니까 감자 먹고 봄철에는 배고프면 나가서 뱀도 잡아먹고 안 해본 것이 없어요.

북한 청취자 여러분께 잠깐 남한의 군대에 대해 정리를 해드릴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남한은 북한처럼 모든 남성에게 의무복무를 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사병의 복무 기간은 육군이 21개월이고 공군이 제일 길어 24개월입니다. 만 18세가 되면 신체검사를 통해 입대를 하게 되지만 대학에 진학하거나 합당한 사유가 있으면 입대시기가 늦춰지거나 또는 병역의무 면제를 받습니다.

대학에 다니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면 제대한 복학생이라고 해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들어온 같은 과 학생들에게 선배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 씨도 나이 때문에 복학생들과 많이 어울렸다는 말이죠.

북한에서도 다니지 않았던 대학을 남한에서 다니자니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이명훈: 당연히 어렵죠. 1학년 때 말하려니까 눈물이 나요. 입학을 하니까 다른 아이들은 수능보고 힘들게 들어와서 인지 공부를 안 하더라고요. 저는 수업 따라가려고 하니까 놀면 안 되잖아요. 나이도 있고 모르는 것이 많으니까 수업 끝나고 도서관에 가서 8시까지 공부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고 또 공부하고요. 매일 공부만 했어요. 그러니까 12학번 중에 1학년 중에는 성적이 상위권에 들더라고요. 코피 터지도록 했어요. 지금도 힘들지만 나름 열심히 하고 시험기간에는 코피 터지게 하니까 따라는 가겠더라고요.

경직된 군생활을 하다가 너무나도 자유로운 세상 그중에도 대학생이란 신분으로 남한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이 사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하면서 서서히 적응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명훈: 충격이 많았어요. 여기선 일단 식당에 가서 아이들과 밥을 먹으면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내잖아요. 북에 있을 때는 내가 돈이 있으면 내가 내고 없으면 얻어먹었는데 여기선 내가 나이도 많고 하니까 내가 밥을 사줬어요. 그런데 왜 밥을 사주냐고 아이들이 물어보더라고요. 처음에는 내가 북에서 온 것을 숨겼는데 말투가 틀리고 하니까 물어봐서 나중에 솔직히 말했어요. 그러니까 아 그러냐고... 공부하는 것도 진짜 친하지 않으면 가르쳐주질 안아요. 점수 성적에 관련이 있으니까 정말 친하지 않고 밥을 사주지 않으면 안 가르쳐줘요. 자본주의 사회가 원래 이런가 하고 처음에는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사회경험이 없고 대학에서만 보냈기 때문에 아직 남한 생활을 이렇다 하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다른 점은 출신성분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경쟁을 통해 대접 받을 수 있는 사회라는 겁니다.

이명훈: 일단 한국에 오면 뭔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책임이 따르죠. 자기가 열심히 한만큼 돌아온다는 거죠. 북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똑같이 나눠먹는데 여기 다르다는 거죠. 제일 좋았던 것이 여기서 내가 하루 나가서 노가다를 하면 9만원을 받는데 그것 가지고 용돈도 하고 쌀 20kg 사면 한달 먹을 수도 있고 일단 열심히 일한만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

28살의 청년 이 씨에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을 하나 던져봤습니다. 모두들 남남북녀라고 하면서 남자는 남쪽이 잘생겼고 여성은 북한 여성이 예쁘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생각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이명훈: 남한여자를 사귀어보진 못했어요. 솔직히 내 생각인데 자본주의라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여자들이 돈을 많이 보더라고요. 고정관념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다가오려고 하지 않고 나도 다가가기 힘들고요.

남한에 가자마자 대학에서 무역을 공부하고 있는 이명훈 씨. 자신의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일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힘든 생활을 한만큼 그때 그 정신만 있으면 세상에 못 이룰 것이 없다는 마음인데요. 그의 말에는 강한 도전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이명훈: 지금도 끓고 있어요. 무조건 사업을 해서 지금부터 준비를 해서 사람 밑에 들어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직접 사람을 고용해서 태평양을 건너든지 대서양을 건너든지 일단 무역을 하는 것이 꿈이에요. 열심히 준비하고 사업을 해서 돈 버는 것이 꿈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대학생 이명훈(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