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이 절 따라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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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는 사람은 행운이 함께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것이 열심히 뭔가를 계획하고 추진한다 해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잘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뭘 해도 일이 잘 풀린다는 탈북여성 김소희(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소희: 모든 일이 내가 생각한데로 이뤄지는 그런 사람이었나 봐요.

탈북자들이 고향을 떠난 이유가 다 나름 사연이 있겠지만 양강도 출신의 김 씨는 좀 남다른 편입니다.

김소희: 저는 사람 때문에 탈북 했어요.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가족이 저를 괴롭히고 해서 화가 나서 나왔는데 여기까지 왔네요.

북한에 살면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을 계속 봐야하니까 그것이 싫어 중국으로 갔다가 함께 했던 동행이 남한으로 가게 되면서 혼자 중국에 남을 수 없어 같이 온 겁니다. 탈북한 것이 2011년이니까 그리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김소희: 제가 군인들을 다 알아서 그냥 넘어와도 되는 상황이었어요. 군인들과 친분관계가 있었거든요. 경계병들이 누나라고 하면서 잘 따랐는데 내가 중국에 가볼까 하니까 그래 누나 갔다가 빨리 오세요라며 넘겨 보냈는데 제가 그냥 온 거죠.

당시는 군에서 제대를 하고 집에 와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소일을 할 때였는데 국경경비대와 친하게 지내던 터라 쉽게 도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남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국경을 넘을 때 함께 했던 친구가 남한으로 가는 선을 알아 일주일 만에

중국에서 남한으로 가게 됩니다.

김소희: 넘어와서 산에서 한밤자고 같이 온 언니가 친척이 도문에 있어서 친척집에 내려가서 말을 하니까 바로 사람이 오더라고요.

남한에 간 탈북자들에 따르면 북한에서 중국 국경을 넘는 비용이 1만 달러 그리고 중국에서 남한으로 가는 데 브로커에게 주는 돈이 대략 3천 달러 선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나마도 북한정세에 따라 비용은 고무줄처럼 많아지기도 하고 적게도 변합니다. 하지만 탈북자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안전을 담보할 수 없어 목숨을 걸어야 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김 씨의 경우는 너무도 쉽게 이웃집 방문하듯 이뤄진 남한행이라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남쪽에 가서 김 씨의 생활을 어땠을까요?

김소희: 제일 힘든 것이 사람이었어요. 하나원에서 집을 주고 하니까 걱정은 없는데 빈방에 들어가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 상황이 힘들었어요.

기자: 빈방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김소희: 빨리 정착을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기자: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김소희: 그냥 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어디 갈 곳이 없어도 씻고 나가고 그러다

보니까 정책을 빨리 하게 되고 어느 날 보니까 내 힘으로 살게 되더라고요.

일단 일을 해야 생활이 되니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을 찾게 되는데 우선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노동일부터 시작합니다.

김소희: 저는 처음 했던 일이 주점 주방에서 그릇 씻는 일을 했어요. 그러다 시설관리

공단에 입사해서 한 달 보름정도 일하다 사고로 산재처리가 돼서 놀았어요. 그때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서 산재처리 돼서 집에서 쉬는 동안 공부하다가 남자 만나 결혼하고 애 낳고 지금은 1년이란 기간이 지나서 사회복지 공부하고 세무회계도 배웠고요.

좋은 직장에 가서도 사고가 나서 계속 출근할 수는 없었지만 일터에서 근무 중 사고가 난 것이라 계속 봉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생활비는 보상금으로 해결이 되고 시간이 나니 공부를 했던 것이고 그동안 대학도 졸업하고 자격증도 땄습니다.

김소희: 세무회계는 별 관심은 없지만 자격증을 땄고 사회복지는 관심이 있어요. 내년에는 그쪽 일을 하고 싶어요.

기자: 사회복지 쪽이라면 뭘 말하는 겁니까?

김소희: 사회복지사로 상담사가 되거나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일이죠.

탈북해 중국생활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남한에 간 경우라 김 씨에게 남한에 도착했을 때 첫인상이 어땠는가 물어보니 이렇게 말합니다.

김소희: 내가 놀랐다기보다는 비행장에 내리면 군복을 입은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뭔가 북한에서 거짓을 배웠구나했죠. 국정원 사람들이 나와서 버스에 태워가니까 이젠 죽었구나 생각을 했는데 너무 잘해주는 거예요. 음식도 북한사람 입맛에 맞게 만들어 주고 하니까 내가 지금껏 북한에서 배운 것이 전부는 아니었구나, 남한사람이 다 나쁜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배우니까 누구보다 지금은 남한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자: 일하면서 벌이가 너무 적다는 생각은 안했습니까?

김소희: 저는 부모 그늘에서 생활해서 돈 버는 것을 몰랐어요. 그랬는데 한국에 와서 브로커 비용 250만원 주고 나니까 50만원이 남는 거예요. 집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가 조금 먹고 덜 쓰면서 살림을 장만하자 했죠. 아르바이트 하면 하루 5만 원정도 밖에 안 되는데 통장을 만들어 조금씩 모으다 보니 돈이 생기고 그때마다 하나씩 장만하다보니까 집을 내가

꾸몄더라고요.

김 씨는 자신도 다른 탈북자들보다 정착이 빨랐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전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풀려서 한국사회와 자기가 잘 맞는가보다 하고 생각을 했다는 건데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닐까?

김소희: 지금도 세뇌된 것이 있어 남한이 좋다 이런 말은 나가서 지금도 못해요. 그냥 살만하다고 하죠. 사람도 솔직히 나하고 안 맞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다보니 어려운 것이 더 없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 살다가 자본주의 사회에 가서 처음에는 모르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뭔가 결정을 내릴 때는 신중했던 것이 큰 어려움 없이 빠른 정착에 성공할 수 있었던 하나의 열쇠가

됐습니다.

김소희: 난 내가 하는 일 외에는 어디 가입을 안 하고 아는 전화번호 아니면 전화를 절대 안 받고 집에 와서 문 두드리며 교회에서 왔어요. 하나님 믿으세요. 이런 사람 잘못만나면 사기 당하기도 하거든요. 저는 집에 와도 인기척을 안내고 살았어요. 내가 아는 것 아니면 안 믿는 다 이런 식이었어요.

기자: 이제는 자신감이 생기신 거군요.

김소희: 그렇죠. 이제는 뭐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생각해서 판단을 하죠.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소희(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