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만에 눈 떴어요

서울 양천구청에서 열린 북한이탈주민을위한 서울남부지역 구인.구직 만남의날에서 탈북 여성들이 각 업체의 채용안내문을 살펴보고 있다.
서울 양천구청에서 열린 북한이탈주민을위한 서울남부지역 구인.구직 만남의날에서 탈북 여성들이 각 업체의 채용안내문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0:00 / 0:00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삽니다. 특히 북한에서 출신성분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북한이 최고인줄 아는데요. 외부세상을 한 번 경험하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바뀌는 데는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당원이었던 탈북여성 박 마리아(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마리아: 중국에 살다가 2007년 10월 브로커 따라서 몽골로 떠나서 다음해 남한에 도착했습니다.

남한에 가서 천주교로 이름을 개명한 박 씨는 2004년 탈북해서 3년을 중국서 살다 남한으로 갑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때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는 박 씨는 동네에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박마리아: 일단 전문대를 졸업하고 북한체제가 좋다 나쁘다 이런 것을 모르고 자랐어요. 교원생활을 했고요. 신랑도 제대군인으로 토대 좋은 당원이고 저는 여맹위원장을 하면서 경리일을 했습니다. 쌀 다루는 일입니다. 배급 주는 일이어서 먹는 것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 때는 먹을 것만 있으면 문제가 없었죠. 저는 조용히 살았습니다.

아이들 교육과 살림 보탬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박 씨는 경리라는 직업이 있었지만 장사도 같이 합니다. 먹고 살길을 찾아, 생존을 위한 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 좀 더 풍족한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건데요. 평양에서 태어나 자란 박 씨는 시집가서도 당원이었기에 남들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게 다른 도시 방문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긴 거죠.

박마리아: 라진에서 청진으로 물건 오면 받아서 평야 가서 팔고요. 그렇게 안 하면 살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형님이 우리 집에 와서는 돈 800을 가지고 달아난 거예요.

박 씨는 믿었던 가족의 배신으로 화가 잔뜩 났고 물건 값을 가지고 달아난 형님을 잡으러 중국엘 갑니다. 계획적인 탈북이 아닌 사업상 도강이 된 셈인데요.

박마리아: 중ㄱ구에 들어갔는데 정착 보니까 내가 살기 위해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하고 빌었어요. 그렇게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풀리더라고요. 그리고 보름 지내면서 내 눈이 뜨였어요. 중국도 못사는 줄 알았는데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거예요. 형님이 내 돈을 가지고 와서 잘사니까 대접을 잘 해주는 거예요. 중국은 처음인데 그때당시 내 머리가 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집에 갔는데 갈 때 텔레비전을 한 대 들고 도강해서 집까지 갔어요. 북한에 와서 일을 하는데 손에 일이 안 잡히는 겁니다. 중국의 노래방이 눈에 삼삼한 겁니다. 신랑하고 얘기를 했는데 신랑은 이미 알고 있더라고요. 그때 신랑이 보위부 일을 했었거든요.

박 씨는 심봉사가 공양미 300백석에 눈을 뜬 것처럼 중국생활 보름 만에 북한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립니다. 마음이 싱숭생숭 혼란스러웠는데 그러던 차에 일이 터집니다. 당원 신분으로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던 사람을 몰래 빼준 것이 문제가 됐던 겁니다. 보위부에서 박 씨에게 조사가 들어갔고 9일 동안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반성문을 쓰기에 이릅니다. 물론 일이 커지자 남편도 나서게 되는데요. 이때 지금껏 몰랐던 사실을 또 알게 되는 겁니다.

박마리아: 신랑하고 갈라질 때 신랑은 다 알고 있었어요. 보위부에서 30분 씩 외부세상 녹화물을 봤던 겁니다. 미국, 중국, 한국 것을 다 봤다고 합니다. 같은 보위부 일을 했지만 여자는 안 보여주고 남자, 그것도 일부에게만 보여줬던 겁니다. 신랑이 봤는데 영화처럼만 산다면 정말 잘 살더라 그 소리를 하더라고요. 저는 한국은 몰라도 중국은 가봤으니까 시골에 가면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먹을 것도 많고 거리가 참 좋더라. 이런 말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북한에 있으면 죽겠으니 중국에 있는 형님을 연결해 준겁니다.

기자: 남편은 왜 안 떠나셨나요?

박마리아: 남편은 아이들이 있으니까 한국에 가라는 소리는 안 하고 중국에 가서 먼저 자리 잡고 있어 언제고 다시 만날 거니까. 몸 건강하고 자리 잡고 있어 하면서 갈라졌어요.

박 씨는 갑작스럽게 탈북을 하게 됐고 이젠 다시 가족에게 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됩니다. 그리고는 중국 생활을 거쳐 신분이 보장되는 남한으로 간 거죠.

박마리아: 한국에 참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원에 천주교, 불교, 기독교가 있는데 천주교에 전화를 했어요. 나왔는데 막연하고 마음이 울적해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천주교 사람이 안 갔는가? 하고 묻는 거예요. 아무도 안 왔다고 하니까 미안하다고 하면서 30분이면 사람이 갈 것이다 하는 겁니다. 전화를 끊고 조금 있으니 남자하고 여자하고 4명이 왔던 겁니다. 청소를 다 해주고 밥부터 먹자고 나가자는 겁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남한에는 탈북자들이 지역사회에 나가 살기 전에 하나원에서 3개월 남쪽 사회 전반에 대해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곳에서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박 씨는 천주교 사람에게 전화를 했고 응답이 왔던 거죠.

박마리아: 청소를 해주고는 남자분이 자기 집에 있는 냉장고를 오후에 가져오고 다른 분은 세탁기, 또 다른 분은 텔레비전을 가져온 겁니다. 하나원 나올 때 쌀하고 김치는 가져왔는데 집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때 너무 고마워서 엄청 울었습니다. 그날은 혼자 자야하는데 여자 한분이 같이 자자고 하더라고요. 그리고는 하나원에서 준 이불을 보더니 너무 작다고 나가서 이불 한 채를 사온 거예요. 그리고 같이 깔고 덥고는 자주더라고요.

이제 본격적으로 남한 생활이 시작되는데요.

박마리아: 제 후배들에게 얘기를 해준다고 한다면 일단은 돈을 벌어라 그리고 어느 정도 생활이 되면 공부를 해라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해봤으니까 일하면서도 공부해라 젊은이들에게는 특히 공부가 중요하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박마리아(가명)씨가 우여곡절 끝에 탈북해서 남한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까지의 과정을 들어봤습니다. 다음 주에는 천주교, 불교, 기독교 등 각종 종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당당하게 정착을 이루면서 경험했던 시행착오 그 뒷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