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생활 자신감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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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뭔가를 그려보려고 해도 결국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결과물이 나오고 그것은 사실과 다를 때가 있는데요. 오늘 소개하는 최형섭 씨는 남한에 가보니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좋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한생활 6년차가 되는 최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최형섭: 밖에 나왔습니다. 집에서는 답답하고 해서요. 날씨가 가을 날씨라 시원합니다.

양강도가 고향인 최 씨는 기자와 전화통화가 이뤄진 시각이 밤 10시를 넘긴 때였는데 밤 공기를 마시면서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에 있을 때 먼저 한국에 간 선배와 연락을 하면서 남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탈북 했는데 그때 결심이 옳았다는 겁니다.

최형섭: 저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선배와 통화를 해봤는데 와보면 좋은 사회고 충격이라고 했지만 상상만 하다가 와보니 상상 이상입니다. 북한에서 힘들게 대학을 졸업하고 북한사회에 절망감이 들었지만 친구에게도 털어놓지를 못하고 살았는데 와 보니 참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열심히 하면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살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기자: 상상했던 것보다 뭐가 좋았다는 것인지요?

최형섭: 북한에는 한마디로 전기가 부족합니다. 밤이 어둡고 텔레비전, 라디오도 못 듣고 하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환하고 밝은 사회란 것이 첫 번째고 식생활 부분에서도 북한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 좋고요.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이 좋은 것도 있지만 북에서는 알지 못했던 자유가 어떤 것인지 남한에 가서야 알게 됐습니다. 최 씨는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탈북을 했는데 일가친척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결심을 말할 수 없었던 것에 안타까움이 더합니다.

최형섭: 내가 여기 올 때 형제들한테도 말을 못했는데 여기선 그것이 없잖습니까? 대통령 욕을 해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것이 상상했던 것보다 좋구나. 언어의 자유라는 것이 참 좋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북한에서 기계과를 졸업한 최 씨는 남한에 가서 자동차 관련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한 직장에서만 계속 일을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보수도 그리 높지 않고 적응하느라 힘들었는데 이제 팀장이 돼서 여러 명을 지시하는 위치가 됐습니다.

최형섭: 제가 6년 동안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이제 일이 익숙해지고 하니까 뭐든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자동차 부품제조 업체입니다. 이제 자신감도 생기고 하니까 한 5년 있다가 내 사업을 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일에 종사한지 10년이 되면 전문가가 된다고 이제 조금만 더 경험을 쌓고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 목표라는 최형섭 씨. 주중에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자신을 위한 취미생활도 즐기고 있습니다.

최형섭: 족구 동우회 총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낚시도 하고요. 그러니 외로움은 명절 때 빼고는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북한에서는 안했는데 여기서 배워서 참 재밌습니다.

남한에서는 가운데 그물로 경계를 쳐놓고 상대편에 발만을 사용해 세 번 만에 공을 넘기는

족구를 많이들 합니다. 좁은 공간에서도 할 수 있고 경기 규칙이 어렵지 않아 자투리 시간에 즐기는 대중적인 운동입니다. 남한에서는 족구를 주제로 한 영화도 나왔는데요. 족구왕이라는 제목의 영화음 잠시 들어보죠.

족구왕: 공을 세게 찬다는 느낌 보다는 ...체육대회 때 보자...

남한에 간 탈북자들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습니다.

최형섭: 북한에서도 축구나 친구들끼리 모여 술도 한잔 하고 했지만 그것은 취미생활이 아니고요. 여기와는 취미 생활이 북한에서와 대비가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좋습니다.

기자: 족구하고 낚시하고 다른 것은 안하십니까?

최형섭: 제가 자원봉사로 마을 방범대 가입한지 한 2년 됐습니다. 한주에 두 번씩 순찰을 돕니다.

기자: 돈 받고 하시는 것은 아니죠?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최형섭: 돈은 받는 것이 아니고요. 보통 9시에 나가서 자정까지 돕니다. 이것은 조별로 4-5명이 요일별로 돌고 있습니다.

함께 탈북한 최 씨의 아내는 남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됐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남한아이들과 똑같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공부도 잘한다고 하는데요.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자랑과 기대에 대한 얘기가 끊이질 않습니다.

최형섭: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인데 앓지 않고 잘 커줘서 고맙고요.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해서 학급회장에 도전한다고 하더니 부회장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잘해야겠죠.

남한의 직장생활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회식입니다. 일과가 끝나면 직장동료들과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노래방이라고 음향시설이 돼있는 곳에 가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부르는 겁니다. 최 씨도 이런 자리에선 인기랍니다.

최형섭: 노래를 많이 좋아합니다. 박상철 씨의 무조건...무조건 무조건이야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특급 사랑이야 ...

행복의 조건이나 그 기준을 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죠. 가난한 사람은 돈 많은 부자가 되면 세상을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부자들은 행복해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최 씨도 가능하다면 자본주의 사회인 남한에서 큰 부자가 되고 싶지만 그가 말하는 부자는 꼭 돈을 많이 버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항상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맞춰 생활하면서 만족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겁니다.

최형섭: 북한에서 가족이 다 같이 탈출할 때는 잡히면 죽는다는 이런 결사의 각오로 잡히면 약도 다 챙겨서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인지 한국까지 잘 와서 살다보니까 북한에서 힘들게 고통스럽게 신경전을 쓰면서 산 경험이 있으니까 잘살자고 온 한국에서는 열심히 하게 되고 앞으로 더 잘해보자는 의지를 가지고 항상 행동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최형섭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