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의 꿈은 의사나 간호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남한에 가서 상담사로 꿈이 바뀌었다는 여대생이 있습니다. 탈북과정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 주위 탈북자들을 알게 되면서 전문상담사가 돼서 그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다는 건데요. 오늘은 남한생활 5년차가 되는 송미향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함경북도 출신의 송 씨는 고등중학교를 다니던 17살 때 두만강을 건넙니다.
송미향: 저는 2003년 탈북 했는데 어머니가 먼저 탈북을 했던 상태였어요. 저는 북한에서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지내다 보니 공부를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엄마가 공부를 시킨다고 중국에서 절 불렀는데...
먼저 탈북해 중국에서 자릴 잡고 있던 어머니는 송 씨를 조선족 학교에 입학시켰고 북한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중국에 있는 동안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남한소식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고 안전을 위해서는 탈북자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남한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송미향 씨는 남한생활이 중국에 있었을 때보다는 심리적 충격이 적었다고 말합니다.
송미향: 새로운 세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요. 제가 중국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어린 마음에 충격이었어요. 내가 생각하고 사는 방식하고 너무 틀렸기 때문에 그랬어요. 처음엔 아무 준비 없이 다른 문화를 겪다 보니까 너무 충격이었어요.
기자: 예를 들면 어떤 충격을 받았다는 거죠?
송미향: 북한은 그래도 아직 조선시대 사상이 많이 있잖아요. 여자들은 항상 몸조심해야 하고 아이들은 어른을 공경해야 하고 이런 거요. 그런데 중국에서는 아이들이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 식사 시작 전에 수저를 먼저 들고 다른 사람 있는 곳에서도 말대꾸를 하고 말을 함부로 하고 이런 거요.
송미향 씨에게 남한에서 살면서 북한에 살 때와 비교해 뭐가 달라졌는가? 남한 생활에 힘든 점은 없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송미향: 남북한이 오래 분단돼 있다 보니까 환경이 서로 달라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고요. 생각 차이가 크더라고요. 처음에는 남한 사람들이 왜 이럴까 하고 이해를 못하고 혼자서 상처받고 고민하다가 차츰 왜 그런지 알게 되면 그때부터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고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만나려고 하고...
중국에선 조선족 행세를 하면서 언어가 틀려 외국이란 느낌을 받았지만 남쪽에 가면 같은 민족으로 환영받으며 살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송미향: 저는 같은 민족이니까 우리를 남한 사람들이 같은 민족으로 받아 주리라 믿었어요. 그런데 외국사람, 이방인으로 대해주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런 것에 상처를 받았어요. 북한에서 임수경의 기록영화도 보고 했는데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저희도 남한에 가면 환호해 주고 환영해 줄 것으로 알았죠.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다들 바쁘니까 내일이 아니다 하고 외면하는 것 같고요.
송미향 씨는 현재 카돌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송 씨는 여느 남한의 여대생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내년에는 졸업반이기 때문에 취업준비도 하고 학과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도서관도 가고 하지만 남자친구와 추억도 만들어 가면서 청춘을 가꿔가고 있습니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죠? 남자는 남한 남자가 멋지고 여성은 북한이 남쪽보다 예쁘다라는 말인데 송미향 씨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송미향: 여기 사람과 저기 사람을 딱 단정 짓고 말할 수 없지만 대개 북한 남자들은 화끈한 면은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런데 남한 남자들은 좀 예의가 바른 것 같아요.
기자: 남자 친구는 어떤 면이 마음에 들어서 교제를 하는 겁니까?
송미향: 나를 진심으로 배려해 주고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많은 얘기를 나눕니다. 많은 대화를 나누니까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요.
기자: 남자 친구 만나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세요
송미향: 만나면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같이 친구도 만나고 그러죠.
남한에 가서 꿈이 바뀌었다는 송 씨 그는 가끔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북한의 가족들도 다시 만나는 날까지 건강하게 지내주길 기도합니다.
송미향: 그런 생각은 종종해요.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랐으면 지금처럼은 살지 않고 좀 더 꿈을 크게 갖고 살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은 해봐요. 반면 내가 북한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여기 아이들이 경험하지 않은 일을 다양하게 겪어서 인간적으로 성숙한 면이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이 취직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북한에서의 꿈은 의사였어요. 사실 실력이 의사가 될 실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막연히 의사나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자: 지금은 뭐든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지금은 꿈이 뭔가요?
송미향: 지금은 상담사예요.
기자: 왜 상담사로 꿈을 바꾸셨어요?
송미향: 중국에서 지내보고 남한 왔을 때 국정원과 하나원을 거치는 데 그 기간이 6개월 정도 되는데 그때 내가 몰랐던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나는 엄마 덕에 공부만 하고 편안하게 살았는데 중국에서 인신매매 당한 사람, 강제북송을 세 네 번 씩 됐던 사람도 있고 고문당해서 상처가 있는 사람도 있고 밤에는 사람들이 잠을 못자더라고요. 그런 것을 보면서 심리적 치료를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10년 뒤 20년 뒤에는 전문직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리고 통일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요. 대학이나 회사를 다니면서 통일에 대해 강의도 하고 싶고 통일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북한의 현실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싶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대학생 송미향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