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들이 보통 불행에 대해서는 잘 알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배가 고파서, 돈이 없어서, 권력이 없으니까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행복에 대해선 바로 이것 때문이다 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요. 오늘 소개하는 탈북여성은 행복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남한생활 2년차가 되는 서윤(가명) 씨의 얘기 전해드립니다.
서윤: 저는 가족 따라 어렸을 때 탈북 했습니다. 9살 때 ...
양강도 혜산이 고향인 서윤 씨는 부모님을 따라 1997년 탈북 합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탈북이 뭔지 또 내일은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무섭지 않았습니다.
서윤: 그 때 당시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아빠가 거기 가면 먹을 것이 많다고 했거든요. 매일 굶지 않아도 되고 쌀밥 먹을 수 있다고 해서 간다고 했을 때 기쁜 마음이었어요.
온 집 식구 5명이 중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런 시간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웃의 고발로 마을에 숨어 살던 서 씨 가족은 모두 강제북송을 당합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살 수 없었기에 6개월 만에 다시 도강을 하게 되는데요.
서윤: 재탈북 했을 때는 둘째 언니와 저만 탈북 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요. 큰 언니는 아직도 행방을 몰라요.
기자: 지금은 누구와 살고 있습니까?
서윤: 둘째 언니와 있어요. 저는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실감이 안 났어요. 진짜 한국에 온 것인지 긴가민가했죠.
이제 20대 후반이 된 서 씨에게 북한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북한에서 산 세월보다 중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은 것도 있겠지만 아픈 기억은 잊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 씨는 남한과 북에서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서윤: 지옥과 천국이라고 할까요. 과하게 표현하면 북한은 제게 아픈 기억이 많아서 그렇고 한국에 와서는 즐거운 일도 많았고 친구도 많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서 제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서윤 씨가 말하는 아픈 기억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부모님이 탈북을 결심하게 된 배경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윤: 저는 북한에서 둘째 언니 외에 모든 가족을 다 잃었어요. 원래 남동생이 있었는데 영양실조로 죽는 바람에 탈북 했던 것이고 북송돼서 부모님을 잃었고 큰 언니까지 생사를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북한이 모든 것을 앗아간 곳이라고 보거든요. 북한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을 윗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다보면 자기 생각이 없어져요. 희망도 없고 꿈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북한이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남한생활은 2년 밖에 안 됐지만 서 씨는 현재 자신이 천국에 살고 있다고 말했는데요. 너무 좋다는 뜻이겠죠?
서윤: 제가 많이 밝아졌어요. 표정도 마음도 밝아졌고 예전에 비해 많이 웃고요. 제일 좋은 것은 제가 행복하다는 것, 축복 받은 사람이란 것을 한국에 와서 알게 된 거예요. 부모님도 잃고 힘든 과정을 겪은 것도 있지만 그나마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지금 점점 저는 행복해 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기자: 어떤 것으로 그런 느낌을 받는 겁니까?
서윤: 첫 번째는 저를 많이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렇고 두 번째는 생각지 못했던 아름다운 곳을 가보고 직접 체험해 본 것이 좋은 것이고 세 번째는 중국에 있으면서도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사정상 못가고 그러면서 꿈이 없어졌는데 여기서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꿈을 되찾았어요.
경북대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서윤 씨는 정규 교육과정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남한에 가서 최고 지성인들이 공부하는 대학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서 씨가 다시 찾은 꿈은 교사가 되는 겁니다.
서윤: 제가 중국에 있을 때 한국회사에 다녔는데 말을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나를 가르쳐 주면 며칠이 지났는데 기억하더라고요. 그런 것에서 보람을 느꼈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하려고 마음먹었어요.
중국에서도 학교를 좀 다니긴 했지만 남한에서 학력 인정이 안 돼서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중고등학교 과정을 끝낸 후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선 인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기에 한글도 다시 배워야 했고 역사나 수학 등 새로 익혀야할 것이 많았지만 8개월 만에 끝내고 대학 생활을 하는데요. 기자가 어렵지는 않은지 질문을 하니 반반이라고 합니다.
서윤: 저는 다른 곳에서 대학생활을 안 해서 비교를 못하겠는데 저는 대학생활이 어려우면서 쉬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본인의 의지에 따라서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어려운 것은 저보다 나이 어린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렵고 쉬운 것은 제가 중국에서 오래 있어서 공부는 쉽고요.
기자: 어린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서윤: 문화 차이도 있지만 세대차이라고 할까요? 아이들이 즐기고 좋아하는 것들이 제 나이에는 지난 거예요. 예를 들면 아이들은 남자 얘기 어디 가서 노는 얘기를 하면서 좋아하는데 저는 흥미를 못 느끼니까 대화가 안 되고 그래요.
남한생활은 대학진학을 위해 공부한 8개월과 입학 후 정신없이 보낸 한 학기가 전부인데요. 자주 웃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항상 내일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계획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서윤: 젊은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 그 아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모습만 봐도 웃을 수 있을 때 상대방이 웃을 때 따라 웃고 상대방이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눈물을 흘릴 때 같이 울어줄 수 있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서윤(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