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60십이 넘은 사람도 80살 노모에게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이 불안해 보입니다. 길을 건널 때도 차조심 해야 하고 밥을 먹어도 체하지 않도록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하고요. 그렇게 부모가 볼 때 자녀는 언제나 보호해야할 존재인 겁니다. 오늘은 부산에 살고 있는 박민옥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박민옥: 저 북한 땅에다 자식을 셋이나 묻어 놓고 와서 영감노친은 배부르게 밥을 한술 한술 먹을 때마다 그 자식들 생각이 나서 목이 메요.
함경북도 아오지가 고향인 박민옥 할머니는 올해 74살입니다. 북한에서부터 건강이 안 좋아서 거동이 불편합니다.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환갑이 다됐을 때인데 남편이 보위부 사건에 연루돼 누명을 쓰고 처벌을 받게 되자 중국으로 도망을 쳤고 그 후 박 씨는 어린 손자 3명을 데리고 혼자 살다가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박민옥: 큰 손자 하나 데리고 사는데 할아버지 있을 때는 8살이었고 그 후 4년이 흘렀으니까 12살인데 술을 20kg 맡아서 라진선봉을 드나들면서 술장사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나하고 동생을 먹여 살렸죠. 나는 그때 허리 좌골신경통이라 거동이 힘들었고요. 손자가 시장에서 벌어오는 것으로 셋이서 목숨을 연명하다가 너무나도 살기 어렵고 땔감도 없고 고생스러워서 남포 동생에 있는 곳으로 갔어요. 가니까 동생 남편이 죽어도 같이 죽자면서 형님이 중국 갔으면 죽었겠지 살아 돌아오겠냐고 했어요. 그렇게 남포서 1년 있었는데 기별이 온 거예요.
2003년 박 할머니는 남편의 연락을 받고 중국에 갑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넘어온 지 한 달 만에 남한행을 하게 됩니다. 그때가 환갑 때 벌어진 일입니다.
박민옥: 한국에 와서 하나원에 가는데 잘 왔다고, 정말 잘 왔다고 우리보고 좋은 나라에 왔다고 말합디다. 저녁 식사하려고 들어가니까 큰 다라기에 쌀밥하고 반찬이 여섯 가지지 어떻게 이렇게 밥을 많이 해놓고 먹이는가? 깜짝 놀랐어요. 인천에서 하나원 갈 때 어디 가는가 하고 물어봤더니 서울 간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북한에 있을 때 서울에는 미국놈이 들어와서 사람들 막 죽이고 그런다고 알았거든요. 거기 가면 어떡하나? 했더니 막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니까 하루 세끼주고 부부가 왔다고 한방에 넣어줘서 생활 했는데 정말 행복했습니다.
한평생을 북한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결혼해 자녀를 키우며 살았으니 당연히 남조선 서울은 무서운 곳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와보니 딴 세상이었기에 놀랐던 거죠. 여느 탈북자들처럼 북한에서 외부세계 라디오 방송이라도 들었으면 좀 사정이 나았으련만 박 할머니니 소위 말해 북한에서는 당성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박민옥: 저는 북한에서 식당부분에 있었어요. 식당에서 요리도 하고 창고를 봤어요. 거기는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을 최고로 쳤어요. 먹는 부문이니까요. 우리 남편은 안전부에 있다가 당 일군 할 때도 저는 식당에 있고 해서 크게 식량고통은 못 받았어요.
보통 자신에게 익숙한 곳을 떠나 전혀 다른 세계 그러니까 낯선 세상에 가면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앞서는 법인데요. 남한에서 사회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을 나와 부산에 집을 배정 받았을 때도 기분이 좋았답니다.
박민옥: 아니 무섭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이라고 경찰에 데려왔는데 집을 보니까 아파트에 들어와서 이게 내 집인가 했어요. 굴뚝도 없는데 스위치만 누르면 불이 들어오고 밥가마가 말을 하고 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는가 했어요. 좀 더 늦기 전에 이런 좋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벌써 왔겠는데 했어요. 우리도 벌써 와서 한국에서 내 힘으로 흙 한 삽이라도 떠서 일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박 할머니가 정착할 때만해도 남한에 탈북자 지원법이 지금 같지 않아서 자원봉사원이 아닌 담당형사가 초기 정착을 도와줄 때입니다. 남한에서 형사를 북한으로 치면 보안원쯤 되는데 형사는 이들 부부에게는 정말 은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마운 대상이었답니다.
박민옥: 그때는 형사님이 집에 뭘 사야하는지 형사님이 데리고 다니면서 샀어요. 냉장고도 사고요. 며칠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서류 수속할 것 다하고 해서 걱정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해서 무섭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행복하니까...
박 할머니 부부가 남한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 있을 때 좋은 사람을 만났기에 가능했습니다.
박민옥: 원래 중국에 있을 때 우리는 돈이 없어 못 오는데 중국에서 착한분이 돈을 줘서 우리가 왔어요. 와서는 정착금 나오는 것 3개월에 한 번씩 해서 3년 돈을 보내줬어요. 그리고 정착금 다 떨어지고는 한 달에 나오는 생활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북한에 있을 때보다는 많이 좋습니다.
남한에 간 탈북자는 기본적으로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그리고 생활지원을 정부로부터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이고 보통은 일을 해서 경제적 자립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박 할머니 부부처럼 건강이 나빠서 또는 나이가 많아 일을 못할 경우는 나라에서 생활지원을 하게 됩니다.
박민옥: 나가서는 일을 못하고 남편이 한 번은 건설에 나가 일해 보겠다고 갔어요. 북한 형제도 도와줄 수 있겠다 해서 나갔어요. 하루 7만원을 버는데 3일 나가고 나서는 치질 있는 사람이 해산을 한 것처럼 피를 쏟았어요. 그래서 이건 아니다 절대 나가지 말라우 당신은 그리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집에서 봉투 만드는 가공일을 했어요. 그것도 일감이 없어지더라고요. 제일 후회 되는 것이 좀 젊어서 왔으면 어땠겠는가? 그게 젤 후회돼요.
아무리 부족함 없는 생활이라지만 그래도 북한이 고향이라 텔레비전 방송을 보다보면 북한 소식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박민옥: 하루에도 밥상에서 마주앉아 밥 먹을 때면 수시로 그래요. 우리 지금 북한에 있었으면 이 밥상을 놓고 앉아있었겠는가? 우리는 죽어서 땅속에 들어갔을 거라고 못살았을 거라고 그래요.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하루세끼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이렇게 살수 있겠는가하고요.
현재 남한에는 딸과 손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모두 남한생활에 적응도 잘하고 자기 몫을 하며 살아 고맙다면서 모두가 건강하게 지내주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박민옥: 이젠 나이가 80이 다 되는데 꿈이라는 게 별로 없지만 너무나 고생 끝에 와서 행복하게 사니까 병들지 말고 죽을 때까지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부산에 사는 박민옥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