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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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사는 탈북자의 수가 3만 명에 가깝습니다. 이렇다 보니 북한 엘리트 출신이 다수 있습니다. 최근에 남한에 망명한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의 태영호 공사도 그중 한명입니다. 대좌급 이상 인민군과 국가안전보위부 출신들 그리고 이중에는 방송국 아나운서도 있습니다. 오늘은 탈북여성 김정현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정현: 제가 북한에서도 방송 경력이 한 20년 되다 보니까 북한사회로 말하면 아주 엘리트층은 아니지만 괜찮게 살았고 ...

북강원도 출신의 김 씬 고난의 행군 시절 이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던 북한주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제난이 닥치자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친정아버진 군에 30년 넘게 복무하시면서 훈장을 넘치도록 받고 공로자로 쌀과 돈이 나왔지만 그것이 끊기고 맙니다.

김정현: 1996년에 저희 아빠가 굶어서 돌아가셨어요. 저희가 보는 앞에서요. 그리고 96년 겨울에 중국에 친척이 있어서 한 번 갔다 오면서 중국의 현실을 보게 된 거예요. 당시에는 이것도 다 선전이겠지 했는데 한 번 더 갔다 오는 과정에 한국과 북한 밖의 다른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됐어요.

2003년에 탈북해 중국으로 갔는데 바로 북송당합니다. 그러면서 6개월 동안 노동단련대 생활을 하게 되고 더 이상 북한사회는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에 재탈북 합니다. 그리고 3년을 중국에서 숨어살다 2012년 남한에 도착합니다.

김정현: 완전히 다른 세상이죠. 제가 강원도에서 태어나 남한에서 들어오는 삐라를 자주 보고 아빠가 군인이라 3.8선 부근에 오래 살았어요. 거의 50년 북한에서 살면서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한국은 감기를 앓는다. 또 남한은 역적만 살고 거지 많은 열악한 곳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남한에서 사회를 알기 전에 직장생활을 했는데 그래도 세상에 이런 나라도 다 있구나. 북한에서 한 두 시간이면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바로 한 강토에 사는 남조선이 이렇게 지상낙원인 줄은 몰랐죠. 너무 깜짝 놀랐어요.

단순히 높은 건물이 많고 자동차로 거리가 주차장처럼 돼버리는 외형적인 것만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닙니다. 김 씨는 북한에서의 방송경험 덕분에 남한에서도 바로 개혁방송이란 인터넷 방송국에서 일하게 됩니다. 남한생활이 이제 겨우 4년여 되는데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상상을 초월해 매일 새롭습니다.

김정현: 제가 한국에 와 살면서 보니까 자유로워요. 북한처럼 언제 일어나라 몇 시까지 조직생활해라 이런 규제가 없어요. 자기가 알아서 돈도 벌고 하는 것이지 누가 시키는 것이 없어요. 그런 자유가 좋았고요.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분리수거를 하는 날 아파트에서 내려가 보면 쓸 만한 음식들 빵, 감자 등을 유통기간 지났다고 마구 버리고 여기 사람들은 많이 먹고 사람들이 몸이 나니까 살과의 전쟁을 하고 기름 덜먹기, 고기 덜먹기 이런 운동을 하고 돈을 내고 헬스클럽에서 살을 내리느라고 운동을 해요. 북한에선 제가 올 때만 해도 아침 먹고 저녁 먹을 쌀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두 번째는 정치적으로 볼 때 1인 시위도 할 수 있고 대통령도 맘에 들지 않으면 욕을 할 수 있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 이익이 철저히 보장되는 나라라는 것을 실감했거든요.

생김생김도 그렇고 쓰는 언어도 그렇고 비슷한듯하면서 완전 다른 것이 현재의 남한과 북한의 상황이랍니다.

김정현: 남과 북이 분단돼서 70년을 살다보니까 그냥 김치 먹고, 된장 먹고 같은 한글을 쓰고 문화가 같다는 측면 말고는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언어조차 똑같은 조선말인데 예를 들어 핸드폰으로 노래를 듣다가 택시에서 내려야 해요 그럼 엄마가 아이를 보고 야 죽여라 내리자 이러니까 택시 운전사가 깜짝 놀랐다는 거 아니에요. 택시 운전수를 죽이라는 말인 줄 알고요. 소리를 낮춰라를 북한에서는 죽여라라고 하거든요. 이런 식으로 같은 말인데 의미가 달리 들리는 것도 있고요. 영어는 융통성 있게 받아치려면 공부를 좀 해야죠. 영어를 잘 모르니까 마트 가서 옷도 사 입을 수가 없어요. 북한에선 호수라고 하는데 여기선 사이즈라고 66, 88 이렇게 말하고 스몰 ,라지 이러니까 알아들을 수 없어요. 색도 북한은 빨간색, 노란색 이러는데 여긴 영어로 말하고 심지어 식당에서 음식, 커피도 사먹을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이 상당히 무서운 장벽이에요.

서로 다른 문화는 자신이 일하는 방송 분야에서도 나타납니다. 방송경험이 20년 이상 됐지만 그것은 북한에서의 방송이고 남한은 또 달랐습니다.

김정현: 저는 언론에서 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뉴스나 정치적 관심사를 전달하고 하는데 전달 방법도 북한과 달라요. 북한의 화술이 한국보다 두 음절이 낮아요. 여기는 미,파 정도의 음절이면 모든 화술이 되는데 북한은 쏠,시까지 갑니다. 북한방송 화술에다 남한 화술을 약간 섞은 것 같은 그런 어조로 뉴스 전달을 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빨리 남한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배우고 또 익히는 길을 택합니다.

김정현: 그런 감정은 취직을 하고 보니까 북한에서는 컴퓨터를 만져도 안 본 사람이 모든 일을 컴퓨터로 해야 하는데 기술이 없으니까 낮에는 방송국을 다니고 저녁에는 컴퓨터 학원을 다닙니다. 북한에서 저도 전문대학을 나왔는데 여기 중학교 지식정도밖에 안돼요. 모든 사람의 지식수준이 높고 유학도 하고 현장 경험도 하고 해서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학력도 고학력이고 이런 사람들과 어느 순간 일을 같이 하다보니까 상당히 좌절감이 느껴졌어요. 과연 이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 내가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나보다 괜찮은 사람이 들어온다면 나는 자릴 내놓고 나가야 한다는 의식이 들면서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 할까? 상당히 걱정이 됐어요. 그래서 우선 학원도 다니고 사이버대학도 다니고 자격증도 따고요.

현재 북한개혁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는 김정현 씨. 방송을 듣는 사람이 남한사람이든 북한 사람이든 언제나 사실만을 전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송인이 되고자 합니다.

김정현: 통일이 5년 후, 10년 후가 될 수도 있는데 그때를 대비해서 저는 열심히 이왕이면 방송분야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뉴스를 전달해 주고 저들이 저처럼 모르고 살기 때문에 북한 밖에서 돌아가는 얘기를 앞으로도 계속 알려주고 싶어요. 저는 꿈이 통일 되는 날까지 방송국 아나운서로서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 방송인 김정현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