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유물이 늘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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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으로 간 탈북자들은 처음에는 빈손으로 남한정부 또는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지만 정착기간이 어느 정도 되면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자립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9년차가 되는 회사원 탈북자 이봉수(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 씨는 2000년 두만강을 건너 3년을 중국에서 살다가 남한으로 갔습니다. 탈북 전 함경북도에서 대학을 나와 공장 기업소 일꾼으로 평범한 청년이었는데요. 그는 고향을 떠날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봉수: 대학 다닐 때 라디오를 저녁 시간에 많이 들었는데 세계뉴스 국제 소식을 들으면서 자유민주주의 나라에는 인권이 보장되고 그런 사회에서 꿈을 실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중국으로 갔고 남한까지 오게 됐습니다.

이 씨가 남한 땅을 밟았을 때는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수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터 시작했는데요. 북한에선 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했지만 남쪽에서 한 일은 막노동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봉수: 한국에 왔을 때 아파트 물탱크 청소도 했고 호텔에서도 일했는데 일하면서 제가 4년제 대학을 나와야만 이 사회에서 남한 사람과 경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대학에 갔습니다. 지금은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대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나름 대학을 가려고 했던 것이 인생에 선택을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대학입학 당시 나이가 몇 살 이였습니까?

이봉수: 그때가 29살 이었습니다.

기자: 남한사람 같으면 졸업했을 나이인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없었나요?

이봉수: 그렇지는 않습니다. 북한에선 대학을 나왔지만 남한사람은 20살에 대학에 가니까 제가 비록 29살 이었지만 20살이란 심정으로 다녔습니다. 지금 남한생활 9년차 인데 야간 대학원 다니면서 석사를 마쳤고 현재는 박사과정에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저는 9년 안에 세 개 과정을 했기 때문에 늦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대학 졸업한 것을 인정받아 남한에선 3학년에 편입을 해 4년제 과정을 2년 반 만에 끝냈습니다. 많은 수의 탈북 청년들이 남한에 가서는 대학보다는 돈 버는 일에 몇 년을 쓰게 됩니다. 그러면서 남쪽 사회도 알아가고 하는데요. 이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번듯한 직장에 취직을 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선 남쪽 대학 졸업장 즉 남한사회 에서 인정하는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하면서 느끼게 됐고 대학 졸업을 했습니다. 그는 현재 직장인으로 7년을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봉수: 회사 생활을 하면 정기적 수입이 보장이 되고 회사에서는 대학 졸업자를 우대 합니다. 급여도 차이가 나고요. 열심히 노력하면 급여도 올라가고 진급도 하고 임원도 되기 때문에 ....

청취자 여러분은 남쪽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평사원이 진급을 하고 관리자가 되는지 아십니까? 이 씨의 설명을 들어보죠.

이봉수: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를 하면 3년 이상이 되면 근무 평가에 의해 대리가 됩니다. 그 이후 3년을 더 하면 과장 진급을 하고 10년 이상이 되면 차장이 되고 최종까지 본인이 열심히 한다면 사장도 될 수 있는 거죠.

기자: 남한 회사 생활에서 동료와 경쟁하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이봉수: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언어는 통하지만 남북한 생활이 틀리기 때문에 문화의 차이로 서로 갈등이 생기지만 어떻게 대처 하는가에 따라 틀려진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입사해서는 북한의 집단체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개인주의 조직사회에 잘 어울리지 못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고 나니까 동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어느 사회든 개개인이 갖고 있는 특성이 틀리기 때문에 본인의 노력이 필요한 거죠.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더 나은 생활, 행복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는 이 씨. 그는 현재의 생활에 안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남쪽 사회는 자신이 하는 만큼 그 대가가 분명히 따른 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봉수: 북한에서의 삶의 보았을 때 거기서는 관료화 됐고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하겠지만 남한은 북한에 비해 자기 한만큼의 대가는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7년 회사 생활을 했는데 급여도 처음 입사 때 보다는 많이 올랐고 차도 샀습니다. 남한생활에 있어 차는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주말에 어디 좋은 데 가서 온화한 곳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하려면 차가 있어야죠. 회사 근무 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차도 구입을 했는데 미화로 하면 2만 달러정도 되는 차입니다. 그리고 집도 20평정도 되는 정부 아파트에 있다가 차도 구입했지만 모아둔 돈으로 이번에 30평 아파트에 입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제 소유입니다. 하나씩 자산이 늘어가는 거죠.

30대 후반이 돼버린 이봉수 씨 이제 큰 아파트에 안정된 직장에 생활에 필요한 주변 여건은 갖춰졌고 인생의 반려자만 만나면 부족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언제 결혼을 할 것이냐고 기자가 물어봤습니다.

이봉수: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답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늘이 주는 인연은 정해져 있다고 하는데 제가 원하는 사람은 착한 여자 그리고 저에 못지않게 살아가려는 의지가 있고 단정한 자세의 여성스러운 분이면 좋겠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회사원 이봉수(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