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꽃제비라고 부릅니다. 보통 20세 미만의 청소년인경우가 많지만 나이가 50세가 될 때까지 13년 동안 꽃제비 생활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남한 생활을 막 시작한 탈북자 김도을(가명)씨의 경우인데요. 오늘은 김 씨를 서울에서 만났습니다.
기자: 선생님은 북한 어디서 사셨습니까?
김도을: 양강도 혜산에서 살았습니다.
기자: 언제 탈북 하셨나요?
김도을: 작년 7월입니다.
기자: 당시 혜산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김도을: 그때는 장사를 하거나 밀수를 하거나 하는 사람은 생활이 좀 괜찮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는 것이 막연했습니다. 저는 추방 나가서 집 없이 13년을 살았습니다.
그냥 몇 해도 아니고 13년을 꽃제비, 남한에서는 노숙자라고 부르는 그런 생활을 했다는 김 씨의 말이 쉽게 와 닿지 않아 북한에서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봅니다.
기자: 어디서 주무시고 어떻게 생활을 하셨습니까?
김도을: 제일 힘든 것이 겨울입니다. 밖에서 비닐을 쓰고 집 모퉁이나 구석진 곳에서 자는데 그 추위를 견디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북한에는 공동묘지가 많은데 살기 너무 힘드니까 그곳을 지나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죽은 사람들이 너 왜 그렇게 고생을 하냐? 그러지 말고 내 곁에 오라. 죽어보니까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너 그렇게 고생하지 말고 빨리 죽어서 동무하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딸들 소식이나 알자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기자: 탈북해서 중국 땅에서 고생했다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북한에서 그런 생활을 하셨나요?
김도을: 중국에 넘어와서는 바로 잡혀 북송됐습니다. 2005년 중국에서도 공안국에 잡혀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북한 보위부 집결소 들어가 취급받고 잡혀 북송될 때 사실은 죽자고 결심하고 중국에서 나오는 편도편 75알을 먹었었습니다. 그런데 딸들이 공안 국에 잡혀 가는 차안에서 아버지 죽지 말라고 울면서 말했는데 그때 내가 죽어야 너희가 나가도 무사할 수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김 씨가 말한 편도편은 중국제 신경안정제도로 아픔을 멈추게 한다는 약입니다. 다량을 복용하고 자살을 시도 했지만 비닐에 싼 것을 먹어서인지 깨어났을 때는 심한 중독 증세로 몇 달을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수용소에서는 다리에 동상마저 걸려 갖은 고생을 다하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그는 자기 한 몸 편히 누일 곳이 없습니다.
김도을: 집이 없는 상태에서 장마당을 돌아다니면서 쓰레기장도 뒤지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북한에도 명절 때는 씻지도 않고 옷을 더럽게 입고 다니면 도로질서가 문란해진다고 잡아갑니다. 북한에 620상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꽃제비 상무라고 하는데 보호소에 잡아넣는단 말입니다. 어떤 때는 겨울에 너무 추워서 거길 찾아가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 받아주질 않는단 말입니다. 지금 혜산시내 실정을 밖에 나와 생활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밑바닥 생활을 북한 사람도 잘 모릅니다.
기자: 아이들은 꽃제비라고 하는데 어른들은 뭐라고 합니까?
김도을: 어른도 같습니다. 집이 없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은 꽃제비로 취급합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에서는 그런 사람들 배려를 많이 준다고 하는데 보호소에 가보면 강냉이 죽을 먹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화장실에 배설물로 떨어진 콩알을 옷에 씻어서 먹는단 말입니다. 그 안에서는 허약 걸려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옆에 앉은 사람을 보면 목에도 있고 너무 많아서 옷에 꽉 줄지어 끼어있습니다.
김도을 씨는 탈북당시 혜산에 꽃제비는 더 느는 추세였다고 했습니다. 당국에서도 620상무를 통해 꽃제비 단속을 하지만 감당을 못할 정도였다고 덧붙입니다. 그렇다면 지난해부터 탈북비용과 남한입국에 드는 브로커 비용은 남한 돈으로 300만원 미화로 3천 달러는 든다고들 말하는 데 어떻게 도강을 할 수 있었는지.
김도을: 나는 넘어오기 전에 도로를 왔다갔다 열 번 이상했습니다. 약초꾼으로 꾸미고 왔다갔다 하다가 강이 제일 넓고 깊은 곳을 헤엄쳐 넘었습니다. 넘을 때 이번에 잡히면 세 번째이니까 만약 잡히면 죽는다 생각하고 산에가 약초 한 것을 팔아서 장에 가서 싸이나를 샀습니다. 조금만 먹어도 죽는 약입니다. 강을 건너서 젖은 옷을 짜면서 그것부터 찾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물에 젖어 다 녹아버렸단 말입니다. 이제 잡히면 죽기 위해 이걸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산을 넘으면서 독풀로 보이는 것은 다 뜯어다 찧어서 준비를 했단 말입니다. 밤이 돼서 산 꼭대기에 도착해서는 한숨자고 날이 밝은 다음에 마주 보이는 북쪽을 바라보면서 그땐 생각도 많고 눈물도 흘렸습니다.
운명은 뭔가를 마지막 선택을 시도한 김 씨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김 씨는 절망의 끝에 섰던 순간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김도을: 그때 당시 생각은 엄마가 우리가 추방 나가 우리 때문에 걱정도 많이 하고 이러다가 돌아가셨는데 솔직히 엄마에게 빌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북한 땅을 밟지 못하니까 내가 이제 가다가 잡혀 죽어도 몸은 못가도 영혼은 엄마와 함께 할께....
기자: 얼핏 봐서는 몸도 그렇게 고생한 분 같지 않고 건강해 보이시는데요. 앞으로 남한에서 어떻게 사시고 싶으세요.
김도을: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더 잘 살자고 생각합니다.
기자: 이제 남한 생활 두 달인가요?
김도을: 한 달입니다.
기자: 한 달 소감은 어떻습니까?
김도을: 별난 세상에 온 것 같습니다. 일생 이렇게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사람도 좋고...
기자: 설명을 좀 하시자면
김도을: 건물도 좋고 모든 면에서 나는 정말 다 좋다고 생각됩니다.
기자: 앞으로 잘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세요?
김도을: 네, 북한에서 한 것 절반만 해도 잘살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최근 남한 생활을 막 시작한 탈북자 김도을(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사이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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