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중국어 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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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먼저 탈북해 남한에 정착한 가족이 있으면 탈북과 동시에 직행으로 남한행이 이뤄지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중국에서 짧게는 몇 년 길게는 10년을 넘게 살다 탈북자의 남한행이 이뤄집니다. 오늘은 중국에서 9년을 살다가 최근 서울에 정착한 탈북여성 김영희(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영희: 제가 나올 때는 2006년 22살이었습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함경남도 출신의 30대 초반 김영희 씨는 최근 7살 된 딸과 함께 서울에 정착을 합니다. 중국생활이 길었던 탓에 처음에는 한국말조차 서툴렀다고 하는데요. 몰라서가 아니라 사는 환경이 갑자기 달라져서 문화충격을 좀 먹었던 모양입니다.

기자: 한 달 살아보니까 어떠세요?

김영희: 한 달 사니까 처음 보다는 적응이 됐어요. 살만은 한데 살아보니까 서울을 선택한 것이 조금 후회 되요. 차도 많고 복잡하고요. 지방이라도 깨끗하고 한산한 곳이 맞지 않는가? 그런 생각도 들어요. 처음에 나라고 한국 수도에 살지 못할까 꼭 서울에서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었는데 아파트도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고 서울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고요. 밤에는 화려한데 낮에는 실망감이 들 때도 있고요.

북한에서 바로 남한에 간 탈북자들은 우선 빽빽이 들어선 건물과 도로의 차를 보고는 놀랍니다. 너무 복잡해서 정신을 못 차린다고들 하는데요. 김 씨는 중국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처지라 그런 충격은 남한에 직행한 다른 탈북자들보다는 크지 않았습니다. 대신 새로 시작하는 남한생활을 환경이 좋은 곳에서 그리고 새집에서 하고 싶었는데 그런 기대치에는 못 미쳤던 겁니다.

김영희: 중국에서 살 때도 시내에 가면 건물이 꽉 차서 한국하고 비슷하거든요. 저는 베이징이나 상해 쪽을 상상했는데 기대를 무척했는데 좀 달라서 실망스러운 것도 있고요.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때부터 동, 니켈, 아연, 등을 파는 금속장사를 했다는 김 씨가 북한을 떠난 이유는 이렇습니다.

김영희: 고난의 행군 때는 엄청 힘들었고요. 17살부터 양강도 혜산 쪽으로 금속 장사를 갔습니다. 불법이었는데 그렇게 안 하면 살수가 없으니까요. 이익이 엄청 많은 대신에 위험한 일이죠. 그 다음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제련소 다니면서 우리 집 살림이 좀 폈어요. 그때 북한 현실에 환멸을 느낀 거죠. 당시 한국 드라마를 봤는데 엄청 대비가 되더라고요. 외국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금속장사를 해서 담이 큰데 중국에 가고 싶다 한국에 가고 싶다. 아니면 미국에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먼 길을 돌아서 이제 남한에 간 김 씨. 고향 떠난 지 거의 10년이 됩니다. 낯선 땅에서 새출발을 하자니 하나부터 열까지 장만해야할 것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인데요.

김영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치약이나 칫솔 같은 것은 하나원에서 가져 와서 괜찮았는데 필요한 것을 사자니 가게를 가야겠는데 집 잊어버릴까 힘들었고 조금 걷다가는 돌아보고 확인하고 그랬죠. 나가서 빗자루부터 양념통까지 다 사고 하나하나 장만했어요. 지하철, 마을버스 타는 것도 도움을 받아서 한 번 타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북한에서부터 유난히 체격이 외소하고 말랐던 김 씨는 한국에 도착해서도 영양실조에 B형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잘 먹고 푹 쉬면 좋아지는 병인데 북한처럼 먹을 것이 없어 생긴 병도 아니고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써서 일까 아니면 성격 탓일까? 뭐가 됐든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김영희: 저희 집 앞에서 조금만 가면 시장이 있습니다. 거기 가면 전부 다 팔아요. 멀리 안가도 다 살 수 있는데 영양실조 걸린 것은 입맛에 안 맞아서 안 먹어 그랬습니다. 하나원에 있을 때 돼지 축사가 옆에 있었는데 냄새가 너무 나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기자: 이제는 자기가 해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괜찮겠네요?

김영희: 그렇죠. 지금은 시장에서 사서 먹고 해먹고 하니까 문제가 없죠. 이따금씩 칼국수 같은 것 먹을 때는 일이 많으니까 아이하고 나가서 사먹고요.

청취자 여러분은 고향사람이 남한에 가면 어떤 것을 제일 힘들어할까? 사는 것이 다른데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하시죠?

김영희: 당황스러운 것은 제가 적응력이 좀 빠른데 한국 사람들 말을 따라가려고 하죠. 남북한 말이 같지만 뜻이 좀 다른 것이 있는데 생각을 하면서도 말을 볼펜이라고 안하고 원주필이라고 하고 오징어를 낙지라고 하고 머리를 자르는데 머리하는데 가서 머리 깎아 주세요라고 할 때가 있어요. 말을 하고는 내가 실수를 했구나 하고 다시하고요.

북한을 떠날 땐 혼자였지만 이젠 중국에서 태어난 딸아이와 함께입니다. 이번에 남한국적 취득 신청을 해서 호적이 정리되길 기다리는 중입니다. 문건이 만들어지면 아이는 학교엘 가게 되고 자신도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많답니다.

김영희: 아이가 제일 걱정이고요. 공부를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한 달에 기초수급비 42만원 받아서는 어림없잖아요. 북한에선 고등중학교 졸업할 당시는 사범대학을 추천받았습니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대학엘 못간 것이 한입니다. 일단 아이 학교 문제 해결을 하고 일자리를 잡아서 일하면서 공부를 하려고 해요.

두드리면 열린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판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뭐든 급하게 필요로 하면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애쓴 만큼 보답이 있을 거라는 희망의 말인데요. 김영희 씨도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새로운 출발선에서 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김영희: 대학에 가면 중국어를 하고 싶어요. 내가 욕심 부려서 되는 것은 아니고 뭔가 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중국에서 살아서 말고 알고 글도 아니까 더 공부를 해서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컴퓨터 학원에 가서 자격증도 따고 중국어 자격증을 따서 취직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영희(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