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발견이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뭘 하면 잘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며 살면 행복할 수 있는지,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이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면 사는 것이 재밌을 겁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7년차 탈북여성 박지선(가명)씨의 이야기입니다.
박지선: 그때는 한국까지 올지 몰랐고요. 그냥 중국에 친척이 많고 또 제가 가서 1년 동안 돈을 벌어오자 해서 사실 떠났어요.
함경북도가 고향으로 북한에 있을 때 대학에서 경영을 공부했지만 원했던 곳에 취직을 할 수 없었고 2002년 그렇게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남한 사람이 운영하는 통신 회사에 들어가게 됐고 2년 후엔 남한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중국에서 일하던 그 회사에 취직을 합니다. 같은 일이었지만 중국에서 일할 때보다 남한으로 가서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기자: 어떻게 보면 지사에 있다 본사로 옮긴 것과 같은데 왜 그렇게 힘들었습니까?
박지선: 우선 한국에 오니까 제가 위축이 많이 된 것 같아요.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고 사실 제가 많이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국정원과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내가 모르는 것이 많고 한국생활이 좀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전에는 중국에서도 살았는데 한국가면 힘들겠다고 생각을 안했는데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거죠. 그런 마음에 회사에 갔으니까 회사에서도 전화를 받으면 말을 잘 못 알아들으니까 전화를 못 받겠는 거예요.
남한에 가면 탈북자들이 거치는 곳이 하나원입니다. 남한입국 탈북자를 대상으로 남한사회적응교육을 하는 곳인데요. 박 씨는 자신감을 얻기보다 두려움을 알게 된 곳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박지선: 하나원에서 나쁜 말을 해서가 아니라 한국이 좋다는 말만 듣고 왔는데 오니까 법은 어떻고 은행 이용은 어떻게 하고 이런 것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이 되는 거죠. 교육을 들으면서 내가 준비가 안됐구나 하고 생각이 들면서 두려워지는 거죠.
통신회사에서 1년 그리고 회사를 나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 교사로 다시 1년을 있다가 대학 편입을 하게 됩니다. 박 씨가 선택한 전공은 상담과 사회복지. 대학생활은 정말 인생에 있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박지선 씨를 홀로 설 수 있도록 단련시킨 곳입니다.
박지선: 제가 학교를 힘들게 다녔어요. 북한에서는 영어를 배우지 않았는데 한국 대학에서 영어 수업이 있고 수업 들어가도 교수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고 숙제를 내줬는데 숙제가 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다음날 숙제를 안 해가서 교수님께 물어보고 교수님이 다시 설명을 해줘서 다시 들었는데도 모르겠는 거예요. 마지막 순간까지 과연 내가 졸업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었거든요. 그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항상 그랬어요. 졸업하면 모든 것이 끝이고 고생을 안 할 줄 알았어요.
한고비를 넘으면 좀 편한 세상이 펼쳐질까 했는데 대학졸업 후 직장을 잡기 위해 면접을 보고 입사 원서를 다시 넣고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적잖은 나이도 신경이 쓰일 법 한데요.
박지선: 처음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때 왔으면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24살에 중국에 있으면서 얻은 경험이 많거든요. 지나고 보니까 그때는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경험이 바탕에 깔려 지금이 있지 않나 그래서 어린 나이에 남한생활을 시작했더라면 더 힘들지 않았겠는가?
이제 박지선 씨는 웬만한 것엔 그냥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습니다. 힘들다고 생각했던 순간순간을 다 넘기고 원했던 직장에도 취직이 됐기 때문입니다.
기자: 처음 남한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입사했을 때와 대학 졸업 후 직장을 갔을 때가 틀렸습니까?
박지선: 네, 많이 틀린데 힘든 것에 대한 것은 같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전화 받는 것이 힘들었다면 지금은 전화 받는 것을 두렵지 않지만 다른 기대치가 높아요. 그래서 힘들죠. 이건 탈북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직장인이 경험하는 것 같아요.
기자: 다른 동료와 좀 다른 점이 있을까요?
박지선: 언어 표현이 좀 다르잖아요. 옛날 직장에서도 설명을 하면 네,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될 것을 그러세요. 이렇게 말을 하니까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없으니까 맘대로 해라 이런 식으로 들렸나 봐요. 북한 사람은 직설적인 표현이 많은데 동료들이 그런 것에 대해 처음엔 오해를 많이 했었죠.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해명할 기회도 있고 한데 처음에는 그런 것이 어려웠어요.
기자: 남쪽의 조직생활이 어떤가요?
박지선: 좀 느끼는데 지금은 좀 안 그런데 옛 직장을 보면 동료들끼리 경쟁의식을 많이 갖는 것 같더라고요. 서로 성과에 대해서 신경도 많이 쓰고요. 북한은 창의적이기 보다 복종적인데 여기선 내가 머릴 써야 하고 생각을 해서 중간에 사업을 만든다든가 이런 식으로 회사에 기여를 해야 되는 부분이 있죠.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지만 동료들이 집으로 향할 때 박 씨는 야간 학교로 갑니다. 대학원 2학기를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취직하면 공부는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앞으로 큰일을 하려면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겁니다.
박지선: 교육이 진짜 중요한 거예요. 북한에서 배울 시기에 그 몇 년을 못 배운 것이 계속 영향을 주는 거예요. 내가 지금 뭘 하겠다가 아니라 나중에 한국과 북한이 합쳐졌을 때 중등학생들은 남한 교재를 가지고 바로 학습을 못할 테니까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상담심리를 배우니까 대학원을 졸업하고 배운 것을 써먹을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박지선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