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벌목공 최태선 씨, 둘째 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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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민은 북한 땅을 등지는 순간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됩니다. 다시는 찾을 수도 볼 수도 없기에 그 안타까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요. 오늘은 러시아 벌목공으로 갔다가 현재 남한에 정착한 자강도 송원군 출신의 최태선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최태선: 내가 여기 한국에 왔다는 것을 17살에 헤어진 아들이 이제 37살이 됐겠는데 내가 여기 왔다는 것을 알리자고 물음에 동의한 겁니다.

기자: 둘째 아들과는 러시아에 있을 때 연락이 안됐습니까?

최태선: 네, 러시아에 와서 3개월만에 기업소를 떠났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기업소를 떠나면 편지도 전화도 못합니다. 그때 당시는 핸드폰도 없었던 때입니다. 러시아에 살면서 얼마 있으니까 조그만 전화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러시아에서 16년 살면서 또 한국에 와서도 둘째 아들 소식을 전혀 접하지 못한 것이군요.

최태선: 네,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하고 소식도 전할길도 없어서 밤에는 그리워서 생각을 하면서

울기도 합니다.

최 씨는 기자와 인터뷰를 결심한 것이 북한에 있는 둘째 아들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들에게 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죠.

최태선: 우리 아들하고 나하고 내가 북한을 떠나기 16년 전에 한국 녹음기를 하지고 RFA 방송을 들었습니다. 이번에 탈북자들에게 들어보면 양강도는 다들 텔레비전을 보고 그런 답니다. 평양도 단속이 심한데 녹음기 있으면 새벽에 나도 아들하고 들었단 말입니다. 꼭 이 방송을 듣습니다. 우리 아들이 이 방송을 들으면서 내 이름하고 평양 동대원구역에 살았다는 것만 들어도 이것은 우리 아버지다 하고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최 씨는 지난 2000년 7월 외화벌이 일꾼으로 파견됐던 틴다지구 벌목장을 탈출합니다. 보수없이 일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살길을 찾아 빈손으로 열차에 무작정 올랐던 겁니다. 그리고 16년 후인 지난해 4월 러시아 소재 유엔을 통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최태선: 꿈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당원으로 김일성 정수분자로 생활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에 있다가 오니까 북한에서 들었던 한국에 대한 것은 180도 다른 거짓말이었습니다. 한국에 와보니 북한하고 대비할 수 없는 100년은 앞선 나라입니다. 내가 65살 인데 생각도 못한 세상입니다. 꿈과 같이 모든 것이 인민들이 자유로이 마음대로 놀고 먹고 일하고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단 러시아에선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는데 한국에 오니 신분증을 받게 돼서 당당하게 인생을 살게 된 것이 달라진 겁니다. 또 어디든 갈 수 있고 일하면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점도 만족합니다.

최태선: 내가 여기 와서 느낀 것은 자유민주 속에서도 서로 사람들이 법질서를 지키며 사는 것을 알았고 이웃끼리 화목하고 북한은 집이 없어서 10년 20년 동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는 일만 하면 돈을 벌어 자기 집을 가질 수 있고 또 나는 노동자인데 여긴 삽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기계로 하고 모든 높은 집, 궁전 같은 집을 순식간에 건설하고 서울시나 모든 도시가 평양에 대비할 수가 없습니다. 평양에 거리를 만든 것이 세상 사람들 보라고 겨우 다른 나라 사람을 데려다가 짓은 겁니다. 그러나 한국은 자기 힘으로 촌에 가도 멋있게 꾸려 놓은 것을 봤습니다.

환갑을 넘겼지만 이제 평균 수명이 80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은 계속 일하면서 남한사회를 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태선: 제가 하는 일은 러시아에서 타일을 붙였는데 여기서도 하려고 한달 배웠는데 제 나이에 힘들었습니다. 아는 사장이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지금은 불고기 식당에 가서 숯불을 피워 주는 일도 하고 화장실에 비데 설치도 하고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큰 돈을 벌진 못하지만 정부에서 지원하는 생활비와 시간제 일을 해서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습니다. 그리고 집은 정부에서 탈북자에게 주는 임대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잠자리 걱정도 없습니다.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못했던 여행을 다니면서 남한전국을 봅니다.

최태선: 대구도 가보고 부산도 가보고 속초도 가고 여기 안가본 곳이 없습니다. 어딜 가도 모든 산이 공원같이 가꾸고 나무가 많은 데 북한에 내가 살던 곳은 나무가 없습니다. 석탄이 없고 땔것이 없어 산이 초토화가 됐습니다. 김정일이 80년대 지방 현지지도를 나갔다가 이제는 우리나라 군복을 흙색으로 하자고 그런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러시아를 거쳐 남한에 정착을 한지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열심히 살면서도 항상 쫒기는 듯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데 이제 몸도 마음도 안정이 되고 새로운 인생을 알차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최태선: 북한에서 배운 것은 더 부러운 것이 없는 것이 행복인데 제가 한국에 와서 지금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 정치에 의해 사람들이 키도 못크고 정치에 눌려서 한주에도 회의가 얼마나 많은줄 모릅니다. 또 항일투쟁사 1930년대 이야기를 학습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대학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그럽니다. 나이먹어서 내가 온 것이 한이 됩니다. 내가 65세라고 생계비를 75만원을 줍니다. 북한으로 하면 연령보장금을 줍니다. 더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최 씨의 큰아들은 평양에 살 때인 1994년 8월 15살때 익사 사고로 사망했고 남아 있는 둘째 아들에게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최태선: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내가 이 말을 하면 놀랄 수도 있고 할겁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버지가 북한에서 나무하러 떠났다가 북한에 다신 갈 수가 없어서 가면 나는 감옥이나 총살을 당하는 몸이어서 이 길을 왔는데 한국에 온 것이 옳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아들이 내 말을 듣고 내 말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나를 믿는 다면 내 행동을 꾸짖지 않으며 자기도 생각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 오리라 생각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자강도 출신으로 지난 2000년 러시아 벌목장을 탈출해 남한에 사는 최태선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