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고향] 딸들은 내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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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생을 포기 하지 않고 사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에겐 제일 중요한 버팀목이 되는 건데요. 남한생활 8년이 되는 이숙희(가명) 씨는 자신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두 딸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인 이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숙희: 지금은 모르겠는데 그때는 그때대로 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이젠 거의 10년이 되니까 힘든 것도 다 잊고 좋았던 것도 희미하고.

이제 40대 후반이 된 이숙희 씨는 북한 경제가 붕괴되던 1990년대 말 한차례 힘든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기가 어려워질 무렵인 2003년 북한을 나왔습니다. 당시 남한 정부는 탈북자에게 꽤 많은 정착금인 2 천만 원 즉 1만 8천 달러 정도를 줄 때였지만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시작한 남한생활은 처음부터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이숙희: 나라에서 주는 돈은 2천만 원이라고 해도 집 보증금을 넣고 나면 내가 나올 때 300만 원을 손에 쥐었습니다. 하나원 문 앞에 브로커들이 지키고 서있습니다. 그때 브로커 비용이 500만 원이었죠. 그걸 다주니까 남는 것이 없었어요. 지하철 표 살돈이 없어서 돼지 저금통 털어서 일가고 했어요. 북한에서는 돈이 없어도 형제들이 있으니까 살 수는 있는데 여기는 아무도 없잖아요. 여긴 북한보다는 쌀도 싸고 옷이 없어도 뒤집어 입더라도 입을 수 있으니까 괜찮은데 그 외로움은 말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능력 있고 기술이 있는 사람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즉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겁니다. 일을 하지 않아도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금으로 목숨은 이어갈 수 있지만 이 씨는 북한에 있는 딸을 데려가기 위해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애썼습니다.

이숙희: 식당일이요. 접시 닦고 청소하고 파출부 일을 1년 했는데 일력 사무소가 있습니다. 거기에 등록을 하고는 매일 가서 일감을 받아서 식당일, 집 청소 등을 합니다.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면 그때는 5만원 그 다음 시간당 한 4천원을 받았어요.

기자: 차비와 점심 값은?

이숙희: 자기가 써야 하고 사무실에 등록비를 6만원인가 넣고 달마다 또 몇 만원씩 네가 벌었으니까 내고 했습니다.

일용직 노동일을 해서 하루 일당 5만원을 번다고 해도 차비에 식비를 빼고 나면 하루 40달러 정도. 이 돈을 한 달 동안 아무리 절약해서 모아봐야 1천 달러를 넘기기 힘듭니다. 기본적으로 물세도 전기세 등의 공과금과 손전화 통신비도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절반 이상은 북쪽에 송금하기 위해 저축을 해야 했기에 그 생활은 늘 궁색한 모습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4년 후 아이들을 남한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숙희: 그때를 뒤돌아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아찔합니다. 당시에는 친구들이 주는 옷을 얻어 입은 것 같습니다. 겨울이 됐는데 돈을 주고 사자니까 북한에 있는 아이들 생각이 나고 해서 못 샀어요. 그때는 빨리 할머니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가 돼서 아이들에게 용돈이나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아이들이 있으니까 죽자고는 생각 안 했는데 아주 힘들었습니다.

기자: 그렇게 힘들면서도 남쪽이 좋으니까 아이들을 북에서 데려온 것 아닙니까?

이숙희: 힘들었는데 좋은 점은 북한보다 제일 초보적인 식의주는 해결이 되잖아요. 여기 오면 또 아이들 운명이 바뀔 수 있잖아요. 거기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아무것도 안되잖아요. 큰 딸은 북에서도 공부를 잘했어요.

기자: 파출부 생활을 하면서 힘든 고비를 어떻게 넘기셨어요?

이숙희: 시간이 해결해 준 것 같아요. 난 우울증인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우울증에 걸렸었더라고요. 밖에 나가기도 싫고 사람 만나기도 싫고 텔레비전 보기도 싫고 밥 먹기도 싫고 그냥 방에 3개월을 있었어요. 그러다가 돈이 필요하면 하루 나가서 5만원 벌어 며칠 살고 그때는 그냥 내가 기분이 안 좋구나 생각했죠. 북한에선 우울증, 갱년기 이런 말이 없거든요. 불안했었던 것 같아요.

기자: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증상이 없어졌군요.

이숙희: 그런데 어느 날인가 이렇게 살다가는 내 자식을 보지도 못하고 그냥 죽겠구나.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정신이 돌아오더라고요. 그래서 친구 따라 나가서 기술을 배우고 또 사람들이 이해해주고 칭찬을 많이 해주고 인정해주고 하니까 신이 나서 일을 더 하게 되더라고요. 정신없이 일했어요.

북한 주민이 모든 것이 낯선 세상인 남한 사회에 뿌릴 내리고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말이 통한다고는 하지만 남쪽은 외래어를 많이 쓰기에 꼭 외국에 온 것 같다는 말을 남한에 사는 탈북자들은 자주 합니다. 하지만 정착이란 것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아주 쉽게 이뤄질 수 있다고 이숙희 씨는 말합니다.

이숙희: 내 눈으로 내 세상 보는 것이죠. 내 기준점을 정해놓고 사는 거죠.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있어요. 몇 년 전부터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게 됐어요. 누구 탓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회사에서 뛰쳐나와 1년 정도 머리가 아팠는데 다 용서하자, 원망해봤자 내 몸만 아프고 나만 손해다 해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이쁘게 먹어야 자식이 잘돼요. 내가 느낀 겁니다. 내가 악하게 하지 않고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니까 아이들한테 복이 돌아갈 것이다. 내가 맨 날 누굴 원망하고 그러면 그 영향이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일용직 노동일을 하다가 옷 수선 하는 재봉 기술을 익혀 요즘은 한결 생활도 좋아지고 시간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두 딸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습니다.

이숙희: 이제는 재봉틀 놓고 일감을 받아다가 집에서 일하는 데 돈도 벌만큼 벌고 자유롭습니다. 그래도 아직 힘듭니다. 왜냐하면 터가 없잖아요. 아직 한 10년은 일해서 아이들 뒷바라지해야 하니까 빈손으로 내려왔으니까 아이들 대학 마칠 때까지 엄마가 봐줄 테니까 내가 늙으면 너희가 엄마 책임져라 아이들한테 그렇게 말해요.

기자: 남쪽에 오길 잘했다 이런 생각은 언제 드세요

이숙희: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아이들에게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다 부자는 아니다 임대아파트에 살지만 감사하게 생각해라 남한 사람도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 많으니까요.

기자: 앞으로 계획은 뭡니까?

이숙희: 제일 큰 계획은 아이들이 잘되는 것이고 복권을 맡기 전에 상황이 바뀌겠습니까? 제가 벌어봐야 한 달에 100만 원 정도인데 아이들이 대학 좋은 데 가는 것이고 좋은 남편 만나서 잘사는 것 이것밖에 뭘 바라겠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이숙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사이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