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꿈을 원대하게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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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새로운 사회 정착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기에 남보다 빨리 안정을 찾아 자신의 삶을 가꿔가는 사람은 주위의 부러움을 사게 됩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7년이 되는 회사원 김대성(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대성: 양강도 혜산 시에서 살다가 2000년 탈북해서 중국에서 3년 살다 남한에 와 회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다가 20대 중반에 탈북한 김대성 씨.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위해 남한에 가지만 처음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 조차 하지 않던 막노동일이 대부분입니다.

김대성: 한국에서 했던 일은 아파트 물탱크 청소, 건설현장 노동 그리고 호텔에서 책걸상을 놓는 일도 하면서 사회적응을 하려고 노력했고 이 일을 통해 남한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맘을 정했죠.

일한만큼 수입도 늘어 저축도 하면서 생활에는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 했지만 그렇다고 하루벌이 수입에 의존해 인생을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시작한 것이 대학진학입니다.

김대성: 제가 한국에 입국해 남한사회를 보람차게 살고자 했을 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한 사회는 북한체제와 틀리게 자유경쟁사회 아닙니까? 누구나 기회를 똑같이 주고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본인이 준비하고 갖춰야만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대학을 가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남한에서 저희에게 학비를 내라거나 용돈 벌이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학비도 면제 해주고 생활비 지원도 해주기 때문에 문제없이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대학에서 공부를 원하는 탈북자에 대해 학비를 지원합니다. 물론 남한입국 5년 안에 결심을 하고 나이도 만 35세 이전에 대학입학이 이뤄져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많은 수의 탈북 청년들은 한국에서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일반 주민과 비교해볼 때 특별한 정부 혜택을 누리며 학교생활을 합니다.

김대성 씨 역시 대학 학부 과정을 끝내고 현재는 대학원에 진학해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고 밤에는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겁니다. 북한에서도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 김 씨가 느끼는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점입니다.

기자: 직장생활도 5년을 했는데 북한에서의 직장생활과 다른 점이 있던가요?

김대성: 북한에서 기술 준비실에서 연구원으로 3년 일했습니다. 차이라면 북한에서는 직설적이고 지적 사항이 있으면 콕콕 찍어서 말하고 격려하는 칭찬하고 이런 부분이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회사 생활할 때는 상사와 동료 또 사원 간에 도덕과 예의범절을 지키면서 항상 격려도 하고 칭찬도 하고 때로는 북한식으로 꾸지람도 해야 하고 하는 것을 봤습니다. 제가 남한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이 북한식으로 직설적으로 얘기 했던 그런 것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대학진학을 준비하며 막노동을 했던 1년, 대학생활 그리고 바로 이어진 직장생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7년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고생도 많았던 때입니다.

기자: 누구에게나 시련의 시기는 있는데 그 순간을 극복한 나름의 비결은 무엇인가요?

김대성: 저는 사회적 지인, 대학동기, 직장동료들을 만나 상의 하면서 해결했던 것이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사회든 남한사회든 사람 사는 곳은 같습니다. 좋은 사람에게 다가가 자기의 고충을 얘기하고 도움도 받고 그런 부분을 활용한 것이 남한사회 적응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이제 나이도 있기 때문에 결혼을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아닌데 어떤 배우자를 찾고 계십니까?

김대성: 북한에서 36세면 나이가 굉장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에 와서 남이 하나할 때 많게는 열 개를 해야 대한민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대학에 갔고 지금 이 자리에 섰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와서 나이가 늦도록 결혼을 못했던 것이 열심히 살았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북쪽 여자든 남쪽 여자든 차별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일단 내가 남한에 왔으니까 남한 여자를 만나 결혼할 생각을 자기고 있습니다. 남한 여자 북한 남자가 결혼을 하는 것이 통일에 한걸음 다가서는 그런 모습이란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노총각이라고 자신을 부를지 모르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초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느긋함마저 느낍니다. 김 씨는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것은 노력 보다는 우연히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 와야 한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김대성 씨가 준비하는 미래 자신의 모습은 당당함입니다.

기자: 앞으로 10년 후 또 그 이후의 모습은 어떻게 상상 하십니까

김대성: 저는 어디를 가든 자기를 품어주는 곳 또 인간의 권리를 보장해 주고 정책을 세워주는 체제에 산다면 그것이 바로 고향이 되고 조국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것을 모두 보장을 해줬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되고 제 꿈이 뭐냐고 생각했을 때 저는 남북이 통일 됐을 때 북한 주민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남한에서 내가 배운 자유민주의 경제를 통해 북한에 가서 전주해 한반도 경제가 빨리 살아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 생활이 7년이 되는 탈북자 김대성(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사이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