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 살았으면 시집도 못 갔을 것을 남한에 가서 아이도 낳고 잘살고 있다고 말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올해 남한생활이 6년차 되는 탈북여성 박은희(가명)씨의 얘기를 전해드립니다.
박은희: 2009년 8월에 한국에 왔어요. 그때 잘사는 나라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건물이 멋있었어요. 평양은 모르겠는데 내가 살던 곳은 아파트도 많지 않고 그러니까.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박 씨는 지난 2005년 고향마을을 떠나 중국으로 갑니다.
박은희: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해도 살길이 막막한 거예요. 살 희망이 안 보이는 거예요. 옆에 아줌마가 우리집에 와서는 중국에 안가겠는가 하는 거예요. 그때 그 말에 정신이 확 나갔죠.
그때가 24살이었는데요. 중국으로 가서는 4년을 살다가 남한으로 가는 선을 잡아서 신분이 보장되는 한국행을 하게 됩니다. 중국에서도 조선족이 많다는 연변에 있었기 때문에 큰 건물과 도시 생활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는데 그래도 남한은 중국과는 또 다른 문화권이란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박 씨가 전하는 남북한 차이를 들어볼까요?
박은희: 생활방식이 좀 틀려요. 여기는 외국문화가 많이 들어왔잖아요. 음식도 그렇고요. 북한은 된장찌개 이런 거가 주음식인데 여기는 돈가스 치킨 등 여러 가지 음식이 있고 삼겹살도 거긴 없는데 여기서 접하고 하니까 다르죠. 북한에선 먹을 것도 없어서 힘들었는데 여기는 그런 것은 없잖아요. 음식도 그렇고 옷차림도 다르고요
기자: 옷차림은 어떻게 다른가요?
박은희: 여기는 딱 붙는 레깅스도 입고 짧은 치마도 입지만 거기는 붙는 옷을 입으면 안 되고 청바지도 없고 옛날 방식대로 까만 바지에 치마를 입죠.
기자: 남한의 옷차림이 어떻게 보였습니까?
박은희: 예쁘게 보였어요. 어린 사람이 치마 입고 힐 신고 하니까 예쁘죠. 그리고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해요. 말투도 좋고요. 거기는 툭툭 던지는 식인데 여기는 예절도 바르고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말을 많이 쓰잖아요. 북한에서는 상대방에게 죄송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표현을 잘 해서 좋았어요.
상점에 가면 또는 시설을 이용할 때 그곳에 직원이 고객님 사랑합니다 라는 인사를 합니다. 이런 것이 처음에는 너무 낯설게 느껴졌지만 자꾸 접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따라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좋더란 겁니다.
북한에서는 시집을 가자면 남자가 집을 장만하고 여자가 그 집안에 살림을 채워야 결혼을 할 수 있다면서 북한에 있었으면 시집도 못 갔을 것을 남한에서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다며 남한에 잘 왔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박은희: 오자마자 1년도 안돼서 결혼해서 애를 낳다 보니까 일을 못했어요. 결혼해서 아이가 3살 때 어린이집을 보내고 알바를 했죠. 제가 시집에서 살았는데 거기는 시골이라 회사가 없었어요. 그래 동네 식당에서 일하다가 분가해서 나와서 지금은 생활용품 도매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기자: 거기서 하는 일은 뭔가요?
박은희: 거기서 카운터 캐쉬어를 하고 있어요. 계산원이예요.
기자: 어려움은 없습니까?
박은희: 처음 회사에 들어가서 좀 힘들기는 해도 사장님이랑 부장님이 좋으신 분들이라 나를 차별하고 그런 것은 없고요. 내가 열심히 일을 하니까요.
기자: 탈북자인거는 알고요?
박은희: 네, 알죠. 내가 말을 해서 탈북자인걸 알고 받았거든요.
박 씨가 일하는 곳은 북한으로 치면 평양 제1백화점 쯤 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고위층이가는 특별한 곳이 아니고 주민 누구나 언제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구매할 수 있는 편의시설입니다.
박은희: 생활용품은 다 팔아요. 전기제품부터 냄비, 개 사료 등 생활에 필요한 것은 다 있어요. 그래서 힘들어요. 무거운 거도 있거든요. 철 공구는 무겁잖아요. 이제는 2년이 됐으니까 자리가 잡혀서 괜찮기는 해도 언제까지고 몸 쓰면서 일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잖아요.
박 씨는 6년 살아보니 남한이란 곳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공짜가 없고 일하는 만큼 자신에게 차려 진다’ 쯤으로 고쳐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박은희: 여기서는 어찌 보면 북한보다 살기가 더 힘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는 밥만 먹으면 되는데 여기는 신용불량자 되는 것은 한순간이고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안 되고 그런 면이 있죠.
기자: 자기가 다 알아서 관리를 해야 하니까 그런 거죠?
박은희: 그렇죠. 보험료, 세금, 차 보험도 내고 다 돈이잖아요. 북한에서는 밥 먹고 살고 집에 전기 제품 갖춰놓고 살면 잘사는 집이거든요. 여기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기자: 차도 없고 별로 하는 일이 없으면 신경 쓸 것도 없는데 차가 있으니 세금도 내고 하는 거죠?
박은희: 네, 그래도 열심히 움직이면서 사는 게 낫죠.
고향을 떠났어도 북한과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북에 있는 가족과 연락을 하고 지내기 때문입니다.
박은희: 저는 북한에 있는 엄마와 통화를 해요. 저희 집은 무산에 있어서 가끔 통화를 해요. 가끔씩이라도 엄마가 힘들다고 하면 돈을 보내주는데 그럴 때면 내가 여기 잘 왔다 이런 생각을 해요.
기자: 돈을 보내주면 어떻게 쓴답니까?
박은희: 쌀도 사먹고 하겠죠. 내가 여기 와서 보내준 것을 합하면 2천 만 원은 될 겁니다. 그 돈으로 쌀만 사면 몇 년은 살겠지만 그게 아니죠. 그런데 이번에 또 도와 달라고 전화가 온 거예요. 동생이 결혼을 하는데 분가 시키겠다고 집 살 돈을 보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400만원을 도와줬어요.
400만원이면 현재 환율시세로 3천400달러 정도 됩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엄마의 부탁이니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 이유로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합니다. 북에 있는 가족을 돕는 것도 좋지만 출가외인이라 이제는 자신의 가정을 꾸려야 하기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습니다.
박은희: 저는 집도 사고 싶고 차도 사고 싶고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게 많아요. 그리고 엄마도 데려오고 싶고요. 지금은 일단 이렇게 일하면서 내년에는 컴퓨터 학원을 다니려고요. 그래서 경리직으로 일을 바꾸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박은희(가명)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