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를 하면 행복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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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 정착한 이들은 다 나름 자신만의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못 먹고 못 사니까 살기 위해 떠났고 또 어떤 이는 정말 우연한 일로 나왔다가 남한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은 탈북여성 김승희(가명)씨 이야기입니다.

김승희: 참 정말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2-3년은 몸부림치면서 살았어요...

2008년 남한에 간 김승희 씨는 아들을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가 남한으로 가게 됩니다. 북한에서는 의료일꾼이었던 김 씨는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북에 살 때는 자신이 탈북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을 못했는데요.

김승희: 지금 생각하면 저도 나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죠. 그런 놈은 다 죽여야 된다고 말했죠. 왜냐하면 자기가 태어나 자란 땅을 버리고 김일성 김정일이 자기를 다 먹여줬는데 어딜 가는 거야 하고 엄청 탈북자들을 비방하고 반역자라고 했죠. 그러던 사람이 이 땅에 오니까 아침이 돼도 누가 부르는 사람이 있나? 누가 뭘 물어보는 사람이 있나? 정말 외로워 못 살겠더라고요. 이북에서는 인민반 조직이 있어서 아침 9시면 다 모이고 즐거웠는데 여기선 한 달이 지나도 찾는 사람이 없고 해서 정말 외롭고 힘들었어요.

반평생을 넘게 고향땅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김 씨에게 남한의 환경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겉모습도 같았지만 북에서 알던 남조선과 그 현실은 너무 차이가 컸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밤길에 길은 잃은 사람처럼 헤맸던 겁니다.

김승희: 이북에서 옥수수밥을 먹긴 했지만 여기선 쌀밥 먹고 하지만 이북에 살 때는 한 번도 나쁘다고 생각한적 없고 평범하게 살았거든요.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까 모든 것이 풍요로워요. 거리도 화려하고 텔레비전을 봐도 정신이 혼잡하더라고요. 이 땅에서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이 많았어요. 알바를 하면서 정신을 차렸죠. 우리가 하나원 나올 때는 집에 그릇 하나도 없었어요. 브로커 비용 내고 나니까 남는 돈이 없었어요. 지금 7년이 지났는데도 이런데 그때는 말이 더 험악했죠. 조선말을 아니까 신문을 보고 어디 사람 구한다고 하면 가서 일하고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어요. 누가 물어보면 이북에서 왔다고 하니까 불쌍해하고 하지만 모든 시선을 이겨내면서 살아야했어요. 한국 사람들도 힘들어 하는 일을 하면서 눈물 속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홀로서는 법을 배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김 씨가 말한 것처럼 남한에선 생활총화도 없고 인민반 조직같은 것이 있어서 누가 부르지도 않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북한식으로 하면 자력갱생을 해야 하는데 풀어서 남한 식으로 말하면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김승희: 이북 사람들이 견디는 힘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집에 혼자 있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이 작용을 하더라고요. 자본주의에서는 누가 간섭을 안 하고 내가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감이 잡히더라고요.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내 힘으로 살아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악착같이 일했어요. 아침에 나가면 밤에 들어오고 한 달에 두 번 쉬고 일만 하니까 마지막에는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막 지겹더라고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힘들기도 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일을 하면서 돈은 벌렸습니다. 그것도 일한만큼 꼬박꼬박 통장에 돈을 쌓여갔는데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식당일처럼 허드렛일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했죠. 뭔가 보람이 되고 자신에게 익숙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맘을 먹고 나니 길거리에 의료학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됩니다.

김승희: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다고 하니까 원장님이 들어오라고 하면서 잘 대해주더라고요. 낼부터 와서 공부하라고 해서 일을 그만두고 6개월 산후조리원 학원에 다녔어요. 여기 사람도 남을 위해 베풀려고 하는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죠. 원장님이 열쇄까지 주면서 힘들면 자고 가라고 해서 열쇄는 안 받겠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해서 제가 감동을 받고 한국에 대한 좋은 마음이 들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이제 남한생활 8년차에 접어드는 김 씨는 늦은 나이에 와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합니다. 더 많은 기회를 갖고 도전을 하고 싶은데 늦은 감이 있다는 거죠.

김승희: 북에서는 국가 배급을 타서 살기 때문에 남을 배려하는 것이 힘들어요. 일가친척도 큰일을 치룰 때면 나누긴 하지만 친구 간에도 남에게 뭘 주는 것이 힘들어요. 그런데 여기선 한 번 본 사람도 초청장을 보내면 몇 만 원씩 들고 가잖아요. 내가 만약 젊었을 때 왔으면 많이 벌어서 우리 이북 사람들이 의학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의학대학을 건립해서 누구든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많아요.

김 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외롭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봉사활동에 푹 빠져서 삽니다. 요양병원에 가서 어르신 머리를 깎아주고 주에 한 번은 거리 정화 작업을 하고요. 쉽게 말해서 사람들과 함께 거리 청소를 하는 겁니다. 또 장애인 복지관에 가서 식사를 돕는 일도 합니다. 이것이 김 씨가 말하는 값진 인생입니다.

김승희: 제가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은 봉사를 하면서 느낍니다. 돈을 벌고 통장에 돈이 있어도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남의 머리를 깎아주면서 거리가 깨끗한 것을 보면서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저는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해요 사람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행복하더라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김승희(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