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고 당찬 탈북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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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자신감이 너무 넘쳐 대하는 이를 당황스럽게도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순수해 예쁘게 넘어가게 만드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올해 스물 셋 젊음이 넘치는 탈북여성 김아라 씨입니다. 오늘은 인터넷 즉 가상공간에서 여성의류와 장신구를 파는 김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아라: 피부도 전공하고 화장, 머리 다 배웠어요.

김아라 씨는 대학에서 배운 자신의 전공을 살려 졸업 후 전자상거래를 통해 여성 의류와 신발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가상공간에서의 옷가게 이름은 “ 아라요"(arayo).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들었는데요. 김 씨가 남한생활을 시작한 것은 18살 때부터입니다.

김아라: 북한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 와서 처음 학원을 다녔습니다. 한국말도 제대로 쓸 수 없었어요. 처음 왔을 때는 비싼 돈을 내면서 몇 달을 다니다가 여명학교라고 금방 온 탈북민들을 적응시키는 학교인데 그런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다녔어요. 거기서 검정고시 준비를 하면서 2년 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고 밤 12시까지 공부하면서 2년 동안 모든 초,중,고등 학교 검정고시를 다 봤어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관심 있고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한 거예요. 사람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을 공부하는 건데 지금은 졸업했습니다.

남들은 12년을 배워 가게 되는 대학까지의 과정을 2년 속성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간 대학에서는 꿈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이 제일 하고 싶고 늘 관심을 둔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아라: 학교 다니면서 했던 일이 화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사진 찍는 모델을 했었거든요. 그 일을 하다보니까 그 직업에 매력을 느꼈죠. 북한에서는 입고 싶은 것 못 입고했는데 여기선 새롭고 신기하고 그랬어요. 저는 북한에서 살았기 때문에 남한사람하고는 좀 틀 리잖아요. 남한에서 북한여성의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사람들이 옷 장사는 마지막에 남는 것이 옷뿐이라고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 말이 정말 맘에 들었어요. 옷을 팔다가 남은 것은 북한 가족에게 보내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닌 거예요.

옷 가게 여사장님. 남들보다 좀 더 고급스러워 보이고 예뻐 보이면서도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아야 잘 팔릴 텐데요. 그래서 시간만 나면 옷을 보러 다니고 잡지책을 보고 심지어 길을 걸어갈 때도 주의를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요즘 사람들의 의상에 대한 취향을 관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김아라 씨가 말하는 남북한 여성이 옷을 고르는 취향은 이렇습니다.

김아라: 대부분 여성스럽고 뭔가 고급스러운 쉽게 말하면 단순하면서도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그런 모습인데 북한 사람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화려한 것을 좋아해요. 옷도 북한 여성은 리본이 달리고 꽃도 달리고 빨간 옷에 번쩍 거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남한 여자들은 단순하고 깔끔하고 이런 것을 좋아한 것 같아요. 화려하지 않지만 예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요.

기자: 옷만 파나요?

김아라: 옷도 팔고 장신구도 팔고요.

기자: 북한에서는 자기 돈으로 물건을 사서 장마당 간 물건을 되파는 건데 홈쇼핑은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나요?

김아라: 똑같아요. 동대문 도매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와서 파는 거예요. 처음 하는 거라 돈을 많이 투자하진 못하는데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면서 같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복잡해요. 통신판매업 신고란 것도 있고 전자결재 서비스도 신청해야 하고 생각보다 해야 할 것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진짜 제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힘들어도 재밌어요.

기자: 남한에서 새로운 경험담 뭐가 있을까요?

김아라: 많았어요. 학교 다닐 때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장학금도 받고 돈이 좀 들어왔는데 엄마가 다단계에 걸려들어서 진짜 남는 돈 없이 다 날려서 학교에서 밥 사먹을 돈도 없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지 하는 막막함도 느꼈고요.

어딜 가나 외지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고약한 것이 텃세입니다. 살고 있는 사람은 당하지 않지만 물정 모르는 사람이 모르고 당하고 또 알면서도 아차 하고 빠져 드는 것이 사기인데요. 좋은 물건을 아는 지인들을 통해 팔게 되면 그 물건 값의 일정액을 되돌려 받는 다는 사탕발림의 ‘다단계’란 사기에 걸려들어 김 씨의 어머니가 가진 돈을 다 탕진하게 되면서 살림이 어렵게 된 겁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비온 뒤의 땅이 더 굳는다고 한 번 고비를 넘고 나니 세상을 보는 눈이 한층 넓어진 듯합니다. 조심하게 되고, 조그만 일에도 더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말입니다.

김아라: 나쁜 것도 있지만 좋은 점이 더 많죠.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꿈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요.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학교 광장을 걸으면서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남한에 오길 정말 잘 했구나 북한에 있었으면 초등학교도 못 나왔을 텐데 지금 여기 와서 대학까지 다니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도 느꼈고 할 것이 너무 많다는 벅찬 마음도 들었어요. 북한에서는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는데 여긴 누구 막는 사람도 없고 해서 너무 좋았어요.

김 씨가 고백하기 전까지는 그를 보고 고향이 북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작은 얼굴에 큰 키, 길게 염색을 한 머리에 세련된 옷차림은 영락없는 남한 숙녀의 모습인데요. 그럼에도 유년 시절 기억은 고스란히 함경북도 회령입니다.

기자: 북한에 대한 기억은 어떤 것이 남습니까?

김아라: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혼자 중국으로 갔고요. 아빠가 식량 구하러 나간다고 나가신 후 오시질 않는 거예요. 몇 달을 아빠 찾으면서 헤매 다니다가 전 아빠 친구 분에게 입양돼서 몇 달을 살았는데 중국으로 간 엄마에게 연락이 와서 중국으로 간 거죠. 그 때 우리 동네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죽을 먹고 살았는데 굶어서 죽은 사람이 많았어요.

몇 살 때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 할 무렵을 빼고는 북한에서 행복을 느꼈던 때가 생각나지 않는 다고 말하는 김아라 씨는 이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만들어가는 성인이 됐습니다. 북한 회령이 아닌 남한의 서울에서

김아라: 그럼요...세상이 아름답죠... 제가 뭔가 열심히 할 때 또 힘든데 원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힘든 거라고 생각이 들면 감사한 마음이 들죠.

남한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족한 것 모르고 공부한 친구들과 실력을 겨루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아라 씨는 그것을 남을 누르고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김아라: 북한에 있는 동생도 데려오고 싶고 집을 잘살게 만들고 싶어요. 저희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 있는 사람들도 돕고 싶고요.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돈을 많이 벌어서 힘든 사람들을 좀 돕고 싶어요. 저는 북한에서 많은 고생을 했잖아요. 이런 경험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닥쳐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될 거라고 봐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아라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