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간 탈북자들의 직업이 다양합니다. 정치를 하는 국회위원, 의사, 신문사 기자,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회복지사 그리고 술에 취한 사람을 대신해 운전을 해주는 대리운전기사까지 말입니다. 남한생활 5년차가 되는 탈북여성 고미화씨의 이야기입니다.
고미화: 좀 적게 자고 돌아다녀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 직업을 택한 거죠.
함경북도가 고향인 고미화 씨는 어제도 남들이 다 잠들었을 때 나가 일을 했습니다. 직업이 대리운전기사이기 때문이죠.
고미화: 어제는 좀 빨리 들어갔습니다. 새벽 3시? 보통 오후 5시 반에 나갔다가 아침 6시경까지 합니다.
기자: 대개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가는데 대기는 어디서 하십니까?
고미화: 동네 술집 있고 음식점 있는 곳에서 많이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손님이 원하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는데 그리고는 다시 차 세워 놓은 곳으로 오는 겁니다. 오다가 다시 대리운전 손님이 찾으면 택시 타고 손님 모시러 가는 겁니다.
기자: 대리운전일은 언제부터 하신 겁니까?
고미화: 얼마 안됐습니다. 4개월 됐어요.
운전은 남한에 가서 배웠고 차를 몰게 된 것도 남한생활을 하고부터입니다. 남한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대중교통이 잘 돼있는 나라입니다. 땅 위로는 버스와 택시, 고속전철이 다니고 도심의 땅 속으로는 지하철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어디를 가더라도 교통에 큰 불편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직접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술을 한잔 마시고는 자신의 집까지 태워다 줄 사람을 청하게 되는데 그때 대리운전기사를 전화로 부릅니다. 기사는 물론 손님이 원하는 곳까지 일정 금액을 받고 손님을 차를 몰게 됩니다.
이때 가게 되는 곳은 대부분이 처음 가는 길인데 그 복잡한 길을 어떻게 그것도 캄캄한 밤에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고 씨는 문제없다고 하네요.
고미화: 길은 활동을 하니까 좀 알고 한국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북한 사람이 어찌 알겠습니까? 내비게이션으로 가고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러죠.
고 씨가 말하는 내비게이션은 차 안에 장착해 길 안내를 해주는 전자기기를 말합니다. 이런 장치 덕분에 초행길이라도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기자: 남자 분들이 대리운전을 많이 하는데 어렵진 않습니까?
고미화: 손님들이 좀 물어보는데 여자 남자 일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낮에는 공부를 하니까 일을 하는데 가정형편이 안되면 여자도 나가 벌어야죠. 북한에서는 남자가 나가 벌면 여자도 장사를 해서 집안을 살리는 데 한국은 훨씬 좋은 상황이니까 다 할 수 있죠.
고 씨가 대리운전을 하게 된 것도 낮 시간을 어린 딸아이와 더 보내고 자신의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기자: 공부를 하신다고 했는데 학교 다니시나요?
고미화: 사이버 대학을 다니는데 교통사고를 다녀서 휴학 중입니다. 내년 5월에 졸업입니다.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말을 모르는 외국에서도 살았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현재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고미화 씨가 탈북한 것은 90년대 말로 중국에서 8년 살았습니다.
고미화: 중국에서 살려고 갔던 것이 아니라 한 달 동안 돈 벌려고 갔는데 매매꾼한테 팔려간 거죠. 한 달 동안 돈 벌면 된다고 했는데 되돌아갈 수 없는 그런 길이 됐던 거죠.
26살 때 고향을 떠나게 됐는데 이제 나이 마흔 줄에 들어섰습니다. 여러분도 고 씨의 말 사이사이에 간간히 들리는 여자 아이의 소리가 들리실 겁니다. 기자와 통화를 한 시간은 아침이었는데 딸 그리고 남편이 함께 볼일을 보는 중이었습니다.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절대 평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젠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고미화: 살아볼만한 세상입니다. 북한 같으면 내 꿈이 어떻게 이뤄지겠어요. 내가 학교 때 무용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키가 좀 작고 하니까 안됐어요. 그리고는 북한에서 발전을 못 하겠구나 북한에서는 힘이 없고 부모가 권력이 없으니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고 했죠. 중국에서는 공안이 무서워 잠도 잘 못 잤어요. 밤에는 항상 신발을 문턱에 올려놓고 자고 공안차가 지나가면 산에서 범을 만나면 머리가 곤두선다고 했는데 공안을 보면 정말 머리가 곤두섰어요. 그러다 한국 집에 가서 일했는데 거기서 텔레비전을 보고 그때부터 눈이 뜨였지요. 한국에 북한 사람이 가면 이렇게 대우를 받는구나. 그런데 한국 가는 선을 모르잖아요.
고 씨는 남쪽에서 자동차 부품조립공장에서도 일해보고 또 동네 보건소에서 탈북자를 대상으로 건강상담사로도 잠깐 일도 해봤는데요. 그러면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고미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내가 어려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 돌아가시는 모습을 봤는데 여긴 사회복지가 돼 있어서 노인이 양로원에도 가고 하지만 북한에선 추운 골방에서 혼자 누워 죽는 그런 할머니 모습이 생각나 아직도 마음이 아프거든요. 그래서 아이 데리고 봉사활동도 다니고 했거든요. 할머니들 목욕봉사요. 제 꿈은 사회복지사가 되는 겁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고미화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