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 미국 대사관통해 남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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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간 탈북민의 수가 3만명이 넘습니다. 탈북민들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국가로 가서 정착합니다. 오늘은 중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통해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 노경미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노경미: 북한에서 1990년 중반 최악의 식량난을 겪을 때 생계를 위해 중국에서 돈을 벌 목적으로 딸과 국경을 넘었습니다.

두번이나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하고 2008년 가을 세번째 탈북하면서 남한에 정착한 노경미 씨. 이제는 옛말처럼 말할 수 있지만 탈북해 중국에서의 생활은 악몽으로 남아있습니다.

노경미: 중국 땅에서 숨어살아야 하잖아요. 저는 가정집 보모로 가고 딸은 고등학교 금방 졸업한 것을 잠깐 가서 돈 벌어오자고 하고 같이 갔는데 중국 사람이 나쁜 사람이 많아요. 우리 딸은 배고파 왔으니 잘사는 집에 가서 잘 먹고 놀다가 엄마가 돈 벌어 나갈 때 같이가라면서 일할 집에 아이와 가면 좋아 안 한다는 말을 곧이듣고 아이를 보냈어요. 그래서 딸과 이산의 아픔을 제가 12년 겪은 사람입니다.

중국에서 가정보모 일을 하던 집에서 그집 손녀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배운 노 씨. 우연히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고 재중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서는 북한 탈북자들을 보호하는 국제협정준수가 되게 되었다는 글을 보고 무작정 베이징 열차를 탑니다.

노경미: 내가 있던 곳은 흑룡강성이었는데 베이징에서는 저의 중국말이 통하질 않더라고요. 난민고등판무관실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무슨 생각이었는가 하면 우리 동생이 98년에 두만강을 건널 때 동생, 딸, 나 이렇게 3명이 건넜는데 우리 동생은 너무 못사는 집에 가니까 살기 힘들어서 한국으로 가자고 하다가 내몽골 국경에서 사기꾼에게 걸려서 북송이 됐어요. 그리고 북한에서는 한국행을 시도했다고 해서 정치범수용소로 가게됐어요.

돈을 주고 탈북을 돕는 브로커를 통하는 것보다 자신은 어느정도 중국말로 소통이 되니 베이징에 있는 대사관을 통해 남한으로 가자고 결심했던 겁니다. 그런데 베이징에 도착해 문제가 생겼습니다.

노경미: 무장보안원이 동서남북으로 다 섰고 가시철조망에 감시 카메라에 담장이 3미터 높이예요. 베이징에 있는 모든 대사관은 담장이 3미터예요. 탈북자들의 진입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담이 다 높았어요. 무장보완 때문에 접근도 못하겠더라고요. 정문에서는 여권하고 신분증을 검사했어요. 먼 곳에서 바라만 봐도 심장이 뛰더라고요. 이것도 아니구나 하고 돌아다니던 끝에 미국 깃발을 봤어요.

한국 대사관을 길 사이에 두고 성조기가 날리는 미국 대사관을 발견합니다.

노경미: 무장보안원이 정문에만 있어요. 조선족에게 물어봤어요. 어떻게 다른 대사관과 달리 여긴 정문에만 보안이 섰나 했더니 이사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텔레비전에서 탈북자들이 대사관 담을 뛰어 넘는 것이 생각 나더라고요. 그래서 시장에 가서 일자형으로 된 사다리를 샀어요. 비닐포장이 돼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죠. 한 20분을 기다렸는데 기회가 없더라고요. 그때가 낮 1시였어요. 밤에는 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냥 포장을 뜯고 사다리를 올랐어요. 감시 카메라에 전기철조망이었는데 전기는 안 통하더라고요. 3미터를 뛰어 내렸어요. 감시 카메라를 보던 사람이 뛰어 나왔어요. 그리고 어떻게 3미터 담을 넘었나 해서 사다리를 타고 넘었다 했더니 엄지 손가락을 세워 올리면서 대단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는 내선 전화를 걸어서 한국말 통역을 데려왔기에 북송 시키면 이 자리에서 죽겠다며 감기약(독약으로 알았던 거죠) 갖고 있던 것을 보여주면서 약 먹고 죽겠다고 쑈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런 걱정 하지 말라고 오늘부터 아주머니는 난민인정을 받고 희망하는 나라로 갈 수 있다고 했어요.

미국 대사관에서 그들이 베풀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면서 노 씨의 난민인정 절차에 들어갔지만 그 진행은 더뎠습니다.

노경미: 그때 미국 대사관이 이사를 하다보니 원래 있던 건물이 비어있었어요. 거기엔 이미 25살 탈북민 남자 아이가 있었어요. 나보다 한달 전에 들어갔는데 그 아이는 감시 카메라에 밧줄을 걸어 넘었더라고요. 대사관에서 보안성원이 이미 와 있더라고요. 미국에서부터 우리를 위해 왔다며 3교대를 서더라고요. 우리는 그래도 빨리 온 겁니다. 한국 대사관에 들어간 사람들은 3년까지 있더라고요.

기자: 거기서 먹고 자고 생활했다는 것 아닙니까?

노경미: 네, 그랬죠. 식사는 한국 식당에서 매일 배달을 하더라고요.

기자: 지루하진 않았습니까 뭘 하며 지내셨어요?

노경미: 그저 텔레비전 보는 것밖에 더 있어요? 밖에도 못 나가고요. 우리가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중국 공안부로 우리를 데려가서 중국에서 생활을 다 조사하더라고요. 살인하지 않았는가? 마약장사 안했나? 인신매매 하지 않았는가? 이런 것을 다 조사하는 것이 그렇게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매일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씩 한달에 한두번 와서 물어보고 그 다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물어보고 공안부에 갈 때는 정문에서 난민이라고 하면서 데려갔어요. 대사관 안은 미국 사람이고 밖에는 공안에서 와서 데려갔어요.

최종 목적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 노 씨는 단호했습니다. 그가 원했던 나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거죠.

노경미: 중국에서 여러번 붙잡혔고 중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라도 폭탄을 안고 있는 심정이었어요. 그래서 대사관 원장에게 빨리 우리를 희망하는 나라로 보내달라고 편지까지 썼어요. 어느 나라로 가겠는가 물어봐서 나는 영어도 모르고 아직 북한에 혈육이 있고 딸과도 헤어져서 미국 안 가고 한국 가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미국 대사관에 들어와서 한국행을 선택한 것은 나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중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통해 남한에 간 탈북민 노경미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남한에 가서 딸을 다시 만나게 되고 남한생활에는 어떻게 정착했는지 그 성공담을 전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