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남한의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가요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더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남한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간부들과 인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남한의 드라마와 영화 CD를 선물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김정일에게 전달한 CD에는 김정일이 가장 좋아한다고 알려진 남한의 배우 이영애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들도 김정일이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북한에서 새 영화만 나오면 김정일이 직접 지도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선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정일의 영화 사랑은 도가 지나쳐서 당시 남한을 대표하는 유명 영화인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를 납치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김정일은 1978년 남한 여배우 최은희를 먼저 납치한 후 같은해 신상옥 감독을 납치했습니다. 납치생활 8년만에 북한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후 현재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은희 씨는 앞서 자유아시아방송과 가진 회견에서 김정일이 북한의 영화 발전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자신들을 납치했다며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2년 동안 17개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최은희
: 김정일 위원장이 문화예술에 관해서 관심도 많고 재간도 많고, 조예도 있고 그래요. 이북이 여러 가지 아웅산 사건이라든가 그런 것 때문에 이미지가 나빴었는데,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 좋은 영화를 만들어서 수출 좀 해달라. 그런 요지로 말했어요. 그 상황에서 안한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배우 최은희 씨와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의 생활과 탈출 과정에 대해 쓴 공동 수기 '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를 보면 김정일이 얼마나 남한의 대중 문화를 좋아했고 즐겼는지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 수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자신의 집무실은 물론 관저와 초대소 등 가는 곳 마다 영사실을 설치해 놓고 세계 각국에서 새로 들어온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김정일은 특히 외국영화들 중에서도 남한의 영화를 좋아해서 그의 개인 영화필름 수집창고에는 남조선실이 별도로 마련돼 있어 남한 영화만 3백여 편이 보관돼 있다고 합니다. 북한에 납치됐을 당시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신상옥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 가운데 남한에서는 이미 구할 수 없는 영화 원본까지 김정일이 보관하고 있었다고 이 수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특히 최은희 씨는 북한에 납치됐던 기간 김정일이 주최한 연회에 자주 참석했다고 밝히고, 당시 김정일의 요청으로 남한의 대중 가요를 불렀다고 말했습니다.
(노래) 패티김 이별
지금 들으시는 이 노래는 남한 가수 패티 김의 ‘이별’이라는 곡입니다. 이 노래는 최은희 씨가 김정일이 주최한 측근들과의 연회에서 불렀던 남한 가요 가운데 하나로 김정일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전했습니다. 김정일은 이 노래 외에도 남한 가요 '하숙생'이나 '동백꽃 아가씨'도 좋아했고, 당시 남한에서 유행했던 노래는 모두 알고 있었다고 최씨는 이 수기를 통해 폭로한 바 있습니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도 자신의 수기 '김정일의 요리사'를 통해 김정일과 그 측근들은 연회에서 남한 가요와 일본 군가를 자주 불렀다고 밝혔습니다. 겐지씨의 수기에 따르면, 하루는 김정일의 삼남 김정은의 생모로 2004년 사망한 고영희 씨가 김정일과 연애하던 시절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당시 고씨는 김정일과 벤츠를 타고 밤새도록 남한 노래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고씨는 그 추억의 노래를 자신 앞에서 직접 불러주었다며 그 노래는 바로 남한 가수 심수봉이 부른 ‘그때 그사람’이라는 곡입니다.
북한 당국은 일찍이 남한과 서방 세계의 대중 문화를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문화라며 차단해 왔고 실제로 남한의 영화나 음악을 접한 주민들을 처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같은 김정일의 남한 문화를 즐기는 취미는 북한을 나온 탈북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에 정착한 탈북자 김씨의 말입니다.
김
: 일반 주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일반 주민들은 심지어 중국 노래만 들어도 정치범으로 취급되어 잡혀갑니다. 외국 출판물이나 영화나 음악을 듣는다는 자체가 정치범 수용소로 가던지, 감옥에 가던지, 총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북한 당국의 통제에도 수년 전부터 남한의 대중 문화는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과거에는 주민들이 발각될까봐 혼자서 비밀리에 남한의 드라마나 영화, 가요 등을 감상했지만 최근에는 친구들끼리 모여 함께 즐기는 일종의 놀이 문화로 자리잡았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특히 북한 젊은이들의 경우, 남한 배우나 가수들의 머리모양, 옷 차림, 그리고 말투까지 모방하는 유행이 돌기도 한다고 탈북자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한의 드라마와 영화, 노래 등 대중문화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이 일반 주민들과 유일하게 공유하는 매개체로 자리잡은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