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어린 두 아이의 엄마였던 탈북자 임순희 씨는 북한에서 극심한 생활난으로 자녀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보다 못해 탈출했습니다.
임순희: 2004년도에 더는 가정을 유지 할 수 없게 되자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가정을 유지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해 총구가 겨누고 있는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에 들어와서 천진에 있는 한국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최근 세계 기독교 탄압국가의 신앙인들이 모여 그 실상을 증언하는 모임이 미국의 워싱턴 디시에서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탈북 여성 임순희 씨는 북송, 재탈북의 고난이 신앙통해 어떻게 달라졌고 죽음의 고비를 넘길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오늘 여성시대에서 들려줍니다.
탈북한뒤 다행히 중국에 있는 한국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전도로 조선족 교회를 나가기 시작 했는데요, 생전 처음으로 접한 성경이 뭔지 몰랐다고 하는군요.
임: 회사에서는 주방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러면서 주변에 계시는 조선족 어머니의 전도에 이끌리어 중국 조선족 교회에 가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그 교회에 가서 사실 성경의 말씀이 잘 와닿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북한에서 우리가 자라나면서 주입식 세뇌가, 우상숭배 세뇌가 너무되었기 때문에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찬송을 들을 때 마다 그때 치유가 되고 위로가 된거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간 교회에서는 북한에 두고온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아팠는데 교회에서 찬송을 듣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위로가 되어 놀랐다고 말합니다.
임: 두고온 딸로인해 마음이 아파 울면서 찬송을 하면 거기서 위로를 받아 매 주일마다 다니게 되었어요 그리고 기도를 하면서 두고온 아들이 세살 반이고 딸이 다섯살 반 이었거든요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가슴이 아팠어요 그래서 그 아이들과 가족을 주님께 맡기면서 기도를 하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가게 되었어요.
이렇게 신앙 생활로 위로를 받으며 불안했던 생활이 점점 안정을 찾게 되던 중 갑작기 강제 북송을 당합니다.
임: 일하다가 2009년도에 회사안에 있었는데 한국회사인데 어떻게 고발인지 경찰이 불시에 들어와 강제 북송 되어서 제가 2010년도에 4년형을 받고 전거리 교도소에 가게되었는데 거기서 정말 힘든 고초를 겪을때 저는, 실제로 주님을 많이 원망도 했어요, 그래도 그때 제가 힘들때 마다 위로해 주었던 것은 중국에서 교회 나갈때 성탄절에 추었던 율동과 찬송가 였어요.
임순희 씨는 이렇게 신앙생활의 깊이를 더해 가는 성경공부도 했었는데요 그곳에서 한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탈북민으로 이 분을 북한의 교화소에서 만난겁니다.
임: 저는 중국 연변 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한 선교사님, 우리 탈북민이에요 10년 동안 연길에서 교회 다니면서 성경공부를 했는데 그분을 교화소 같은 감방에서 만난거에요 처음에 감옥에서 그 분을 알게 된 것은 아파서 일을 하러 못나갔는데 제가 앉아 있는 앞에서 담요를 쓴 분이 부르르 떠는 거에요 이분도 아파서 일을 못나간 거에요. 그런데 담요가 떠는데 감방이 작아서 한 호실에 환자들이 알아보지 못하는데 저는 그 담요을 쓰고 떠는 분을 알아 보았어요.
이는 분명 신앙을 갖은 사람들은 알 수 있는 증표로 옆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신앙을 나누는 사람들은 바로 알 수 있다고 하는군요.
임: 아 ! 방언으로 기도하고있구나, 저는 그때 생각했어요 아 이거는 우리 크리스챤들(기독교 신자)만 느낄 수 있는 영적 호흡인거구나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잖아요 담요가 막 떨면서 막 쉬쉬쉬 하는데 저는 느꼈어요 그래서 그때 당시 그분의 신변이 노출 될까 보아 다가가지 못하고 며칠이 지난뒤 2011년 설날이었어요 제가 그 분께 다가가서 손을 잡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했더니 그 분이 깜짝 놀라는거에요.
그야 말로 감방에서 은밀히 생명을 걸고 하는 영적인 기도 였는데 누군가 알아 차린것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의 빛에 역력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동지를 만난거죠.
임: 눈빛이 내가 크리스챤 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 보았어? 그래서 제가 말을 했어요 이러저러해서 알아보았다고 그러더니 자기 소개로 연변에서 북송당했다, 그래서 둘이 함꼐 손잡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했죠 거기서, 기도를 하고 그분하고 저는 힘들때 마다 복음성가 " 반드시" 를 불렀고….
Cut 음악, 반드시
힘들때 마다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그분은 또 거기서 몸이 많이 쇠약했는데 기도를 하면서 전도를 했어요. 그 험악한 곳에서도 전도를 한 명 두 명 했는데 전도는 잘 되지 않았지만 정열이 식지 않고 계속 했어요. 그러다 그분이 기독교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정치범 수용소로 가게 되었어요.
임순희 씨는 교화소에서 나와 다시 탈북해 한국으로 와서 지금은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교화소에서 신앙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함께 은밀히 드린 기도의 힘이었다고 핍박 받는 기독교 세계대회애서 증언했다고 전합니다.
임: 저는 지금 자유를 누리면서 여기서 기도하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우리가 주님을 믿고 기도 했는데 이번에 핍박받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제가 북한의 전거리 수용소에서 제가 그렇게 신양 생활 한것 하고 안 선교사님에 대해서 말씀 드리면서 그분이 우리 시대의 정말 21세기의 사도 바울과 같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라고 말했고, 저 또한 그렇게 보고 있어요" 정치범 수용소에서 지금 그분이 살아계신지 모르겠어요.
탈북자들이 강제 북송당할때 보위부에서 가장 심도 있고 강력하게 조사하는 것이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았는지 교회 다녔는지 선교사나 목사를 만났는지였다고 모든 탈북민들이 말합니다.
임: 저는 강제 북송당할 때는 보위부에서 첫째로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 보았나 한국 사람들 만났나 그리고 교회를 다녔나, 이렇게 몰어보는데 저는 절대로 안다녔다고… 왜냐하면 내가 교회를 다녔다고 하면 나 자신은 괜찮아요 이제 죽어도 괜찮은데 우리 자식들, 한창 자라나는 자식들이 나때문에 또 우리 가족이 그들의 앞길에 장애가 있을까봐 말을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정말 어려운 고초를 많이 겪었죠.
임순희 씨는 교화소에서 고난을 받을때 마다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신 선교사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면서 주님이 동행 해 주실것을 간절히 소망하던중 뜻하지 않은 선물까지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임: 2011년도 11월에 제가 주님의 은혜로 형기가 2년 형으로 감소 되어서 나왔어요. 저는 그때 나와 가지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야 정말 고난은 나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어요 고난을 통해서 저는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제가 정말 힘들어 할 때마다, 제가 고비를 넘을 떄 마다 저와 함께 동행하시고…
그리고 재 탈북하는 과정도 인간의 생각으로는 바로 죽음의 길이었지만 주님이 함께 해 주셨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임: 2014년도 9월에 제가 재 탈북을 하게 된 것도 주님의 은혜였고 탈북하는 과정에 제가 파도 치는 두만강 물에 들어섰는데 강물이 저의 키를 넘어서 제가 막 물살에 굴러갔어요. 그때는 아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강변으로 물이 저를 밀어주는 거에요. 그래서 물에서 나와가지고 제가 주님 주님하고 세번을 불렀어요 그리고 막 뛰는데 살기 위해서 뛰는데 주님을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몰라요 거기서 정말 주님덕에 살았다고 확신을 했어요.
임순희 씨는 세계에서 핍박받은 기독교인들의 대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힘으로 재탈북 시도 할 수 있었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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