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미국의 서부,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는 난민지위를 받고 입국한 탈북여성이 지난 2008년 아기를 낳아 탈북자 자녀 중 최초로 시민권자가 되었다며 화제가 되었었죠. 그 아기가 지금 아주 예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와 함께 비슷한 시기에 애틀랜타에 도착했던 탈북자들이 모두가 잘 정착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지수예 총무 : 이 아기는 역사적으로 탈북민의 첫 번째 아이로 지금 아주 예쁘게 자라고 있어요.
당시 아기와 산모를 돌보았던 조지아 주 애틀랜타 아시안 아메리칸 센터의 지수예 총무는 미국을 전혀 몰랐던 탈북여성인 산모와 아기를 위해 교회와 한인사회의 큰 도움으로 이들이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전합니다. 오늘 여성시대에서 자세히 알아보죠.
5명의 탈북자들이 난민 지위를 얻어 비슷한 시기에 낯선 미국사회에서 둥지를 틀었지만 부딪치는 일은 모두가 어려움뿐 이었다고 아시안 아메리칸 센터의 지수예 총무는 당시를 돌아봅니다.
지: 여기 난민수용소에서 저희한테 연락이 와서 가보면 이분들이 말이 안통해요. 북한 사람들이 언어 문제가 너무 심각하니까 또 북한에서 워낙 다른 시스템, 제도에서 살다가 여기 와서 그분들이 일을 하는데, 여기는 일을 해야 되지 않아요, 그런데 일에 대한 적응을 못하더라고요.
북한에서 갖은 고난을 다 당하고 탈북하는 과정에서 역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생의 바닥까지 내려갔던 탈북자들이기에 미국에 대한 기대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 이었다고 지 총무는 말합니다.
지: 미국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와서 자기네는 천국으로 알고 왔는데 현실에서 부딪치는 것은 그렇지 않죠. 각자 이미 북한에서 문제가 있어 탈출을 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환상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사고가 너무 맞지 않은 거죠. 거기다 공산주의 이념이 완전히 박혀 있기에 어른이 되어서 그런지 바뀌기가 힘들었어요.
어려움에 처한 미국의 아시안 이민자들을 위해 통역도 해주고 번역 서비스와 함께 교육, 직업알선 아울러 미혼모, 집이 없는 난민 홈리스들을 돕고 탈북난민 사역까지 맡았던 아시안 아메리칸 센터의 지수예 총무는 탈북 여성의 출산과 산후 조리를 한인들이적극 맡고 나섰다는데요,
지: 한 친구가 중국의 탈북자 난민 수용소에서 임신을 하고 최초로 조지아에 와서 아기를 낳았어요. 딸을 낳았어요. 이것은 역사적으로 대단한 일이죠 그래서 병원에서 그 아기를 받아서 탈북민의 첫 번째 아이로 여기서 여성 어머니들을 통해 아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지원해주었어요. 그리고 아기 어머니에게도 여기서 아파트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었어요.
아기 엄마는 20대 한창 젊은 나이었지만 탈출과정에서 건강도 많이 잃었고 마음까지 다쳐 산후조리를 잘 해야 산모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고 아기도 잘 클 수 있기에 부모의 마음으로 정성껏 돌보았다고 지 총무는 전했습니다.
지: 여기 목사님 사모님이 산모에게 가셔서 2주 동안 아파트에서 미역국도 끓여 먹이고 엄마같이 보듬고 안아주고 그랬어요. 애기를 낳은 엄마는 감정 기복과 불안이 너무 심해서 새벽 3시 4시에도 우리에게 전화를 하고 매일 울고 그랬어요. 그리고 우울 증 이라기보다도 분노, 두려움, 불안증 때문에 육체적인 아픔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내면의 문제가 너무 힘들었어요.
탈북자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교회 협의회, 한인사회, 그리고 아시안 아메리칸 센터의 직원들 까지 나서서 정말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런 고생이 정말 보람이 있었다고 하네요.
지: 그 탈북자들을 정착 시킬 때 까지는 우리 직원들이 밤낮으로 수고를 많이 했죠. 특히 애기를 낳고 불안 외로움 증 등의 심한 증세까지 나타나고 해서 안정시킬 때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남들이 알지 못 는 일들이 너무 많았어요. 아무것도 없이 가방도 없이 맨몸으로 탈출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말 입은 옷만 입고 온 겁니다. 그런데 한인들이 알게 모르게 의복과 사는 아파트의 생활용품 등을 전부 구비해주고....
이 여성 외에 다른 탈북 여성들도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까지는 교회, 한인사회. 아시안 아메리칸 센터에서 함께 모든 것을 도와주면서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었기에 힘든 시기를 잘 넘겼다고 지 총무는 말합니다.
지: 정착되기까지 감정적인 기복이라든지 생활의 문화 차이, 정서적인 문제가 너무 심각하고요 적응하는데 아이고... 말도 안 통해 저희들이 영어도 가르쳤어요. 북한에 있을 때 영어를 하나도 안 배워 영어가 전혀 안되어 영어문제가 아주 심각했고 너무 힘들었죠. 그런데 커뮤니티 등에서 도와주어서 성공적으로 잘 되었어요.
이외에 탈출과정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숨어살 때 속았던 상처가 너무 깊게 자리하고 있어 그 점 또한 이들이 정착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지: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많으니까 처음에는 안돼요. 그리고 마음의 상처도 너무 많고 그리고 사람을 믿지 않아요. 우리가 탈북민이라서 우리를 이렇게 대우한다, 이런 열등감 이랄까 이런 것이 있어서 그리고 울분과 분노가 너무 많이 있어서 이것을 해결할 때 까지 오랜 치유가 필요 했던 것 같아요.
미국 내 탈북자들을 돕고 돌보는 단체 미주 두리하나의 서재진 행정 간사도 이 단체에서 하는 일을 직접 경험한 탈북자들은 단체와 자주연락하며 도움도 청하는데 잘 모르는 탈북자들, 특히 처음에온 탈북자들은 자신들을 돕는 단체에 대해서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서: 어떤 분은 탈북자를 통해 장사한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이 것 봐라 장사하는 것 봐라 하시 길래 깜짝 놀랐어요. 지금 오신지 7-8년 된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으신 분들도 많으세요. 1-2년 되신 분들이 가장 도움이 많이 필요할 때인데 저희에게 연락을 안 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시간이 점점 흐르고 미국 사회를 알아 가면서 신뢰가 회복되는데요, 주변의 단체나 교회 또는 관심을 갖는 이웃들이 이들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돕는가에 따라 탈북자들이 입은 상처의 회복이 빠르거나 늦어질 수 있다고 지 수예 총무는 강조 합니다.
지: 5 사람을 정착하는 과정까지, 제가 커뮤니티에서 이런 일을 하니까 아이를 낳고 하는 일도 지켜보면서..... 힘든 일 이었어요. 경제적인 면도 그렇고 일을 하려면 차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차도 마련해주고 아파트에도 살도록 해 주는 등 경제적으로도 많이 도와주었는데, 아마 미국에 살아보면 지금은 그분들이 이런 어려움들을 모두 이해할 것 같아요.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가 않아 탈북자들을 돕는 기금모금도 여러 차례 하면서 혼자 일어 설 수 있도록 하는데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는데요,
지: 기금 모금을 했어요. 교회에서 한인 사회 또 여러 곳을 통해서 훤드레이징을 했죠 그래서 정착하기 까지 돈도 많이 들었고 자립할 때 까지 ...한 7-8년, 오래 걸렸어요.
이렇게 힘든 시간들이 지났지만 지금은 애틀랜타의 초창기 때 탈북자들은 생활터전을 잡고 모두가 잘 살고 있다고 흐뭇해합니다.
지: 저희가 탈북자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성공적으로 잘 해가지고 결혼도 하고 특히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결혼을 해서 다른 주로 갔어요. 아기를 낳을 당시 엄마가 너무도 젊었고 스물 몇 살 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 아기는 여기서 어떤 분이 입양했어요. 한국가정에 입양되었어요. 그 엄마가 지난번에 저한테 전화를 했는데 아들 낳고 행복하게 산다고 연락을 했어요. 그리고 그 딸아기는 지금 아주 예쁘게 잘 자라고 있어요.
그 외 30, 40대의 탈북 여성들도 모두 결혼해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다고 전합니다.
지: 3명의 탈북여성들이 모두 한국 사람들과 결혼해서 다 잘 살고 있어요. 지금은 안정되게 자리 잡고 잘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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