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꽃제비들은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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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북한의 안전부는 주민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하고 처리하면서 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사연도 많습니다. 그동안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꽃제비들의 생활은 많이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검은 생전의 생활 보다 더 비참하다는데요,

김: 꽃제비들 죽었을 때 그 시신을 볏짚가지고 엮은 마대가 있어요. 그 마대를 손수레에 깔고 그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다른 마대로 덮어서 ...

마대 주검이라는데요, 안전부에서 일을 했던 탈북여성과 함께 하는 여성시대에서 그 실상을 알아봅니다.

탈북 했다 2번 북송당한 끝에 2007년도에 한국에 정착한 김시연 씨는 아직도 꽃제비 하면 청소년 이하의 떠돌이 어린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꼭 어린이들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전합니다.

김: 나이는 상관이 없고 돈 떨어지고 먹을 것이 떨어지고 해서 거리에서 주어먹고 다니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경우도 있고 이런 사람들의 시신을 안전부에서 처리 하거든요. 여러 부류에요. 꽃제비라고 해서 아이들만 지칭 하는 것이 아니고 어른도 다 꽃제비라고 하거든요.

모두가 먹을 것이 없어 힘들었던 때 이지만 그래도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게 되면 주검에 대한 예의는 차리게 마련이지만 꽃제비 들의 죽음에는 전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는군요.

김: 길거리에 죽어서 쓸어져 있으면 일반인들은 보고도 그냥 지나다녀요. 사람이 하나 굶어죽었구나 얼어 죽었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거든요, 그런데 인민위원회라든가 공직 생활하는 사람이나 인정 있는 사람들이 안전부에 가서 저기 사람이 죽었다고 처리 좀 해달라고 얘기를 해요.

꽃제비들의 시신은 물론 떠돌아다닐 때도 보안 원들만으로는 통제하기가 역 부족으로 9.28 상무를 만들어 이들과 함께 일 했다고 전합니다.

김: 9.28 상무라는 것이 꽃제비들이나 떠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돌보아주고 거리의 무질서를 잘 통제하라고 이런 일은 보안원 들만으로 충족시킬 수 없으니까 노동자들 중에서 일거리가 없잖아요 다 공장, 기업소가 가동이 중단되니까 각 공장 기업소의 노동자들 중에서 선발을 해서 9.28 상무라는 직책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9.28 상무에 동원된 노동자들이 시신을 처리해요.

시신을 위한 아주 간단한 절차와 이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손수레 와 마대뿐 이었다는군요.

김: 자동차 같은데 싣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도 없거니와 휘발유도 없고, 커다란 손수레를 끌고 가서 대여섯 명이 같이 가서 그 시신을 볏짚가지고 엮은 그런 마대를 손수레에 깔고 그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다른 마대로 덮어서 병원 사체실로 실어갑니다.

꽃제비들이야 일정한 장소 없이 여기 저기 다니다 굶어 죽고 추워서 얼어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세상을 떠난 지역의 사체실로 옮겨지는데요, 병원 사체실에서도 바로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김: 어느 지역에서 죽은 시신은 어느 사체실에서 보관 한다 이런 것이 있어요 그렇게 실어다가 놓는데 그 한사람시신을 바로 묻는 것이 아니고 대여섯 명 씩 모일 때 까지 시체를 그냥 방치 하는 거예요.

또 안전원들은 고정으로 시신을 담당하는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순번제로 동원이 된다는데요,

김: 오늘은 시신 처리하는데 감찰과의 어느 지도원이 책임지고 가라하면 9.28 상무들하고 같이 가서 시신을 처리하거든요, 제가 아는 안전원이었는데 동원이 되었어요 원래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었는데 술을 잔뜩 마시고 손에다 크레졸 소독약을 바르고 시신을 처리하려고 하는데 관은 없지만 그래도 시신에 번호를 달고 그 사람의 지문하고 사진을 목에다 달아 준데요. 어디서 살다온 꽂제비인지 모르지만 혹시 후에 누가 찾을까 싶어 그런지 모르겠는데, 얼굴 사진하고 지문하고 남긴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죽은 시신들의 지장을 인주를 묻혀서 다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사체실에는 쥐들이 너무 많아서 시신들이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형편없더라는 겁니다.

김: 겨울인데 사체실 안에 쥐들이 우글우글 한데 그 시신들이 다 뜯기고.. 그것을 보고 와서 너무 끔찍해 밤에 잠을 못자더라고요. 이런 것을 보고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고 그 지인도 너무 한탄스러워하더라고요 세상에 왜 이렇게 되어 가느냐며 그래서 어떻게 묻었느냐고 하니까 올라가서 땅을 얕게 파고 시신을 개 끌듯이 끌어서 가지런히 눕혀서 대충 묻어놓고 왔다는 거예요, 언 땅에서...

한 겨울에 꽁꽁 언 곳에서 하는 일은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땅을 깊게 팔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김: 대 여섯 구 씩 모이면 커다란 달구지에다 싣고 그날 먼저 산에 올라가 땅을 파는 조가 있고 시신을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겨울 같은 때는 땅이 얼어서 깊게도 파지 못하고 얕게 파서 거기다... 관도 없고 뭐 없는 거에요.

그 장소가 김시연 씨가 일하던 보안서 뒷산이었다는데 그런데 문제는 봄이 되어 언 땅이 녹으면서부터였다고 하는군요.

김: 보안서 뒷산 이었는데 높지 않은 산 이었어요 그런데 봄이 되면 땅이 녹으면서 땅이 꺼지니까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한데요 그래서 그 동네사람들이 죽겠다며 아우성인거에요 개들이 땅을 파서 그 시신을 다리 물고 팔 물고 다닌다고, 굶어 죽은 것만 해도 그런데 너무 처참하게 죽어서도 불쌍하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래도 꽃제비들의 시신에는 지문과 사진 그리고 번호를 적어 걸어 주는 것 만해도 다행이었다고 하면서 다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는군요. 특히 북송당해 온 탈북자들이 강제 노동 현장에서 죽었을 때 정말 짐승다루 듯이 했다며 현장을 보면서, 여기서 죽으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형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죽으면 죽어서도 죄인이라는 겁니다.

김: 번호 사진 등을 걸어주는 것은 일반인이니까 그런데요 저도 중국으로 탈출했다 잡혀서 북송되어 나갔었는데 그때 화목도로 산에 나무하러 갔던 아줌마가 46살이었는데 강제 노동하러 끌려 나가 일하다가 죽었어요. 그런데 죄에 대한 형을 다 살지 못하고 감옥 안에서 죽으면 영원한 죄인인거에요 만약 감옥 안에서 생활하다 형을 다 마치고 나온 사람은 그나마 죄를 벗었다고 인정을 해 주는데 형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은 사람은 죽어서도 그냥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언 땅을 대충파고 그 여자를 묻고 부모들이 다 회령에 있었는데도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짐승을 묻듯이 그렇게 그냥 묻어버렸어요 너무 가슴이 아팠는데 우리 모두 다 힘드니까 이 나라는 그런가 보다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되겠지 죽지 말고 살아야 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1990년 중반의 일이었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더욱 안타깝다고 하네요. 지난 겨울철에도 꽃제비 들의 소식을 듣고 언제쯤이면 이런 비참한 소식이 아니라 다른 보통국가에서 일어나는 좋은 소식도 들을 수 있겠나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합니다.

김: 아무리 나아졌다나아졌다 해도 말만 그런 거지 지금도 실제로 사람들이 장사를 하려거나 무엇을 하려고 해도 자본이 없잖아요, 어린 아이들 이런 아이들은 부모가 버리고 가면 완전 방치된 거잖아요 그런 애들이 중국 드나들다가 얼마 전 얘기를 들으니까 꽃제비 아이들이 겨울철에 동상입고 먹지 못하고 배고파 중국으로 들어왔는데 다리가 동상으로 썩어 자른 아이들을 조선족이 돌보아 주고 있더라고요 열댓 명이 되는 아이들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지하에 숨겨놓고, 사진을 찍어왔는데 팔다리가 동상입어서 시커멓게 피부가 다 죽어있고 목숨이 위태로운 애들을 팔 다리 절단된 애들이 있더라고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식당의 음식 남은 것 빵 등을 주어다 애들을 돌보아 주고 있더라고요. 이렇게 꽃제비들이 아직도 많다는 거예요.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꽃제비들이 계속 나오는데 북한 당국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답답한데요,

김: 몰라라 방치를 하는 거죠. 왜냐하면 그 사람들 눈에는 꽃제비들이 보이는 데를 다니지도 않거니와 혹시 지방에 사는 간부들이 안다고 해도 아무리 간부라고 해도 이와 관련된 부서가 아니면 자기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꽃제비가 굶어죽든 길에서 죽든 어차피 국민을 위해서 할 방법도 없지만 그런 생각도 안하는 거죠.

고난의 행군 때 꽃제비 생활을 했었거나 혹은 직접 목격을 했던 탈북자들은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데요,

김: 그 당시는 자기가 힘드니까 미처 생각 못한 것들이 한국에 오니까 정말 북한 사람들은 짐승보다 못하게 사는 구나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구나, 그러니까 북한 얘기만 나오면 탈북자들은 눈물이 그냥 저도 모르게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는 거예요, 자기가 보고 듣고 했던 그때는 생각을 못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너무 가슴이 아픈 거예요.

여성시대 RFA 자유아시아 방송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