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착 유씨 “사람답게 살기위해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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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남편과 아이들 온 가족 모두가 북한을 떠나 중국을 거치지 않고 미국 서부에 정착한 가정이 있습니다. 부모님께는 떠나는 날 까지도 내색 한번 못했다는데요,

유인영: 떠나는 순간까지 얼굴을 마주하면서 말을 못 했어요 그 사회에서 말을 하면 분명히 어떻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잖아요.

많은 탈북민들이 이런 고통과 아픔을 겪고 새로운 곳에서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도 이런 이야기는 다시 꺼낼 때 마다 아물지 않는, 아니 아물 수 없는 상처라고 말합니다. 여성시대 오늘 이 시간에는 미국에 정착한 한 가정의 주부 유인영 씨의 얘기로 함께합니다.

많은 탈북민 들의 탈북 얘기는 공통점이 많죠. 하지만 모두가 자신들만의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유인영 씨는 그래도 자신은 미국으로 오기까지 행운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가정은 어느 단체나 중개인의 특별한 도움을 받지 않고 가장의 결정으로 온 가족이 따라 나섰는데요 하지만 오는 도중 개개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탈북이 가능했다고 하네요.

: 남편의 생각이 너무나도 정확한 것 같아요 떠날 때부터 모든 계획을 빈틈 없이 잘 짰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오면서 도와준 분들도 있죠. 저희에 대해서 굉장히 compassion, 연민을 가지고 안타까워하신 분들도 많았어요. 그분들의 마음이 하나하나 어우러져서 제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되어요. 저희는 중국을 거치지 않고 왔지만 지금도 그 스토리를 한번 씩 꺼내 볼 때 마다 마음이 굉장히 아파요.

그가 행운이라고 말 할 수 있던 것은 북한가족과 잠시의 이별이나 중간의 마음 졸이는 만남이 없이 온 가족이 지금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고 유인영 씨는 말하네요.

: 제가 북에서 두 아이를 낳았어요. 남들을 보면 거의가 남편을 떠나 다 돌아다니다 어쩌다 남편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래도 저는 그런 가슴 아픈 과정이 없이 북에서 만난 그 남편에 북에서 낳은 그 아이들과 함께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부모님들께는 위험한 먼 길을 떠나면서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안녕히 계시라는 말도 못한 체 발길을 돌린 것 이라며 이런 힘든 결정을 내릴 때 까지 마음의 갈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는군요.

: 떠나는 날 까지 떠나는 순간까지 얼굴을 마주하면서 말을 못 했어요. 같은 식구들이라고 해도 너무나 충격적이고 그 길에 무조건 반대 하셨을 분들이니까 그래서 저는 남편하고 가족들 관계에서 많이 갈등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탈북 할 때 나름대로의 생사를 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데요, 유인영 씨가 남편의 선택과 결정을 따르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남편이 그동안 함께 살면서 보여준 신뢰였다고 말합니다.

: 살아오면서 보면 항상 정확한 결정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뜻밖에 저에게 그런 말을 (북한을 떠나자는) 꺼냈을 때 아니 이 사람이 약간 어떻게 되지 않았나, 솔직한 말로, 그런데 늘 상 바깥세상을 동경했다는 사람이라는 것은 많이 알고 있었어요. 라디오를 많이 청취하고 또 여러 경로를 통해서 다른 사람보다 바깥 세상에 대해 많이 알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북한을 나올 때 자유가 그리워서 나온다고 하지만 절실하게 먹을 것과 또 모든 것이 문제가 되어서 나온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저희 남편 경우를 보면 정말 자유를 많이 동경해 오던 사람이에요.

북한의 식량난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길이 없어 탈북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너무 많이 전해진 얘기죠. 그 다음 순위가 아마 북한에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길을 택한 북한 주민들도 많죠. 유인영 씨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왜, 어떻게 왔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애기를 모두 데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느냐고 물으면 저는 그냥 제 생각 그대로 말해요. 저는 그냥 남편 따라 왔어요. 남편 결정에 그냥 obey, 순종하고 따라온 것뿐이에요. 이렇게 말해요. 제가 무슨 사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제가 보는 남편은 바깥세상을 많이 그리워 하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살면서도 이거 우리 사회는 아니다, 하는 느낌은 다 들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남편이 가려는 길은 옳다는 것은 알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그 안에서 살면서 이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용기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저희 남편은 다행히 하나님께서 그런 용기를 주시고 앞을 분간 할 줄 아는 통찰력도 함께 주신 것에 너무 감사하고 있어요.

남편의 결정에 따르는 과정에서 어려움, 물론 컸죠. 항상 올바르게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를 전적으로 동의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까지는 다른 무엇보다 부모님께 전혀 내색도 못하고 멀쩡한 얼굴로 발길을 돌리기 까지 머리로는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결정이었지만 마음으로는 남편에게 화가 나더라는 겁니다.

: 그 결정을 하기 까지 좀 골을 낸 것 같아요, 남편이 굉장히 잘해 주었어요. 원래 무뚝뚝한 성격이라 원래 잘 안 해주는 사람이 잘해 주더라고요 설복하느라고.... 여러 가지 얘기를 많이 했어요. 바깥세상의 얘기도 많이 해주고 그리고 얘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어요. 지금 보면 저보다도 애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이 아주 강한 사람이에요. 이들을 위해서는 정말 목숨이라도...모든 부모들이 아 부모니까 당연히 자식을 위해 바친 인생이지 이렇게 노래처럼 하는 얘기지만 이 사람은 이것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남편이 바깥세상으로 가려는 이유는 자유에 목말랐고 이렇게 지속되는 갈증 속에서 자식들에게 까지 부모가 느끼는 고통을 고스란히 물려 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고 지적합니다.

: 자식의 앞날, 우리 거기서는 (북한) 이렇게 먹고는 산다, 남들보다는 이렇게 저렇게 먹고는 살지만 이거는 사람의 삶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목에 음식이 넘어가고 옷을 화려하게 입는다고 이것이 사람의 삶이 아니지 않는가, 지금도 항상 말해요 지금 이민생활이 간단치 안잖아요, 돈이 없고 무엇이 풍족하지 않아도 우리 인간처럼 살자, 이 사람의 구호가 '없어도 인간처럼 살자'입니다.

미국에서 생활한지는 이제 4년, 지금은 미국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는 유인영씨, 하지만 아직도 남편이 혼자 생활의 모든 짐을 홀로 지고 있는 것 같아서 일터로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답니다.

: (경제적인 부담을 다 안고) 항상 혼자 가는 사람이에요. 항상 혼자 모든 것을 다 걸머지고 가는 사람이어서 저는 항상 뒤에서 보면 굉장히 미안해요. 그런데 이제 4년 살아보니까 지금도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와선 1,2 년 3년까지는 힘들었어요. 지금은 하나님이 옆에 계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지금 하나님이 축복해 주고 계시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가늠이 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께 감사 한다는 말이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지 놀랐는데요, 얘기를 나누면서 어떻게 신앙이 이 정도로 생겼을까? 아니면 혹시 북한에서의 지하교인 중 한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 신앙문제를 꺼냈습니다.

: 저는 기독교에 대해서 별로 안 것은 없고 단지 제가 다른 나라 영화를 보면 크리스마스 때나 기독교에 대한 잠깐 씩 언급하는 내용이 보이잖아요, 그럴 때 마다 아버지에게 물어 보았어요.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에 있나, 이렇게 물어보면 저희 아버지는 허거프게 웃으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그런 것은 세상에 없다 그냥 약한 자들이 상황에 힘든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그냥 우상에 의지하고 싶을 때 본인들이 생각하는 거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은 아니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신앙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는데요, 북한에서 너무 당연한 일인데, 그런데 미국에 와서 살다보니 자녀를 키우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는군요. 아무와 도 얘기를 할 사람이 없어서요.

: 맏이 애 때문에 굉장히 많은 일들이 생겼었어요. 사춘기를 남보다 빨리 받는 것 같아요. 6학년 때부터 겪어 오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변이 아는 사람이 없잖아요 우리 북한 사람들 같은 경우는 그런데 남편한테도 말 못할 그런 때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너무나 긴박한 순간들이 닥치고 해결할 사람은 나하나 밖에 없는데 정말 감당하지 못할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말 할 때가 없어요. 그래서 믿기는 힘들었지만 스토브 앞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무릎부터 꿇고 앉아서 기도한 것이 시작이 된 것 같아요.

아이문제로 너무 막막한 나머지 마음의 얘기를 털어 놓은 것이 기도가 되었고 신앙을 이렇게 싹이 트기 시작했다는군요. 다음 시간에는 미국에서 정착 과정을 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