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남성 여성의 역할이나 구분이 분명했던 시절, 그때 여자 군인하면 평범한 여성의 길로 생각하지 않고 생소했었죠. 그러나 지금은 여성군인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국방 환경도 많이 변화하고 또 여성특유의 섬세함과 감각이 첨단과학 시기에 여군의 다양한 역할을 꼭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김화강
: 여성의 치밀한 부분이 소요되는데 여성들이 일하면 정직하고 꼼꼼하게 일 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한국의 향군여성회장 김화강 예비역 중령의 말인데요, 6.25 60주년 특집 여성시대, 오늘은 한국에서 여군의 시작과 함께 어떻게 활동하고 발전해 왔는지 살펴봅니다.
한국 정부가 수립된 후 사회적 혼란기에 조직된 중등학교 이상 학도호국단의 관련교사로 양성된 여자 배속장교가 여군의 시작이었습니다. 배속장교는 훈련 교관으로 학교나 훈련소 등지에 배치된 장교를 이르는 말인데요, 당시 여자 청년호국대지도자 훈련을 마친 32명을 대상으로 1949년 6월부터 한 달 동안 배속장교 교육을 실시했고 이들이 그해 7월에 육군예비역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여군은 6.25전쟁이 일어난 후 전쟁터에서 본 여자의 용군이나 학도병 이라고 말 합니다. 한국전 당시 미8군 24사단 소속이었던 김영철 씨는 여군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김영철 목사
: 재학 중에 6.25가 벌어지니까 여학생들이 인민군이 왔다 후퇴할 때 국군에 합류해서 도운 겁니다. 역할은 사무적인 일을 도와주는 그런 정도로 군번들도 못 받았어요. 그러다 정전되니까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그랬어요.
전쟁이 끝난 뒤 미8군 24단을 제대하고 서울에 잠시 머물다 미국으로 온 김 영철 씨는 캘리포니아 신학대학 총장을 지냈고 미국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 은퇴한 후 80이 넘은 지금도 집필 활동을 하십니다.
예비역 중령인 김화강 향군여성회장은 1950년 6.25가 일어나던 초기 김현숙 배속장교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성의용군 모집을 제안해 재가를 받아 창설되었다고 자료에 따른 배경설명을 곁들였습니다.
김화강
: 6.25가 발발하고 9월에 창설되었으니까 그때는 병기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 여군은 대적 방송요원, 정훈, 그리고 행정 군부대 위문하는 예술대 등에 편성이 되고 그리고 일부는 전투 부대에 편성되기도 했어요.
한국 여군 사료 집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성의용군 모집 제안을 할 당시 이 대통령은 남자 군인이 쓸 무기도 없는데 여자들에게 줄 무기가 어디 있느냐고 반대를 하기도 했다는데요, 이를 제안한 김현숙 배속장교는 부지깽이라도 들고 싸우겠다고 우겨 여군을 창설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여군 창설은 남한 보다 한참 앞서있는데요, 1936년 4월 항일무장 투쟁 시기, 중국 두만강 부근에서 조직된 여군 중대로 출발 했다는 겁니다. 다시 김영철 목사의 얘기를 들어보죠.
김 목사
: 6.25 때 인민군에는 여군이 정식으로 되어있었어요 그러니까 6.25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여자군인을 훈련시키고 그랬을 겁니다. 우리가 포로를 잡아서 보면 여군이 군복을 입고 있었어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의 여군은 꾸준히 발전해 창설 56년인 1992년 에는 첫 여성 장령, 남한에서는 장군이라고 하는데요, 장군을 배출 했고 계속해서 4명의 장령이 더 나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남한역시 전쟁을 거치면서 의용군에서 여군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쓰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김현숙 배속장교가 한국의 여군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 했고 1955년에 비로소 여군만의 훈련소가 생겼다고 김화강 회장은 전합니다.
김화강
: 창설 되었을 때는 남성들의 훈련소에서 다 같이 받았고 6.25후 서울이 회복되어서 안정이 됐을 때 서빙고에 여군 훈련소가 새로 생겼어요. 그래서 여군 훈련소에서 장병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후의 한국여군의 발전상은 획기적인 일 이라고 하는데요, 김 향군 여성회장은 자신이 군대 생활을 했을 때만 해도 남성과 구별된 업무를 했지만 10여 년 전부터 여성 군인들이 담당하지 못하는 업무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김화강
:우리가 군대 생활을 했을 때는 여군 병과라고 해서 여군이라는 특수 병과에서 주로 지휘관, 행정, 참모 등의 업무를 했었는데 1990에 들어서면서 여군 병과가 없어지고 남자 군인들이 하는 병과로 다 확산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남성들이 근무하는 병과를 다 여군들이 들어가 있는 거죠. 여성 군인 훈련도 남성들과 똑같이 훈련 받아요.
남한에서도 여성 장령, 즉 여성 장군이 배출 되었는데요, 아직은 간호 장교에서 나온 장군으로 병과에서 장군 배출은 좀 더 있어야 한다는 군요.
김화강
: 지금 간호장교의 장군이 몇 명 나왔어요. 여군병과의 여군 장교는 아직 장군이 안 나왔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병과의 장군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머지않아 나올 겁니다.
지금은 앞 다투어 많은 여성들이 군인을 선호하고 있고 특히 여군 장교가 되기 위한 경쟁률은 나날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무려 100대 일 넘는 경쟁률을 보일 때도 있는데 그러니까 자신이 합격하려면 100명을 물리쳐야 되는 만큼 당차고 똑똑한 여학생들이 지원하고 있다는 김화강 예비역 중령의 말입니다.
김화강
: 여군 장교가 되려면 한창 비율이 높을 때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비율에 높을 때는 102대 1이 된 적이 있어요. 그때 시험 볼 장소가 없어 장소를 빌리려고 시험문제 준비며 며칠 밤을 센 기억이 납니다.
이런 여성들은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해사 공사에서 훈련을 받으며 공부까지 잘하고 있어 한국 여성 군인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고 하네요.
김화강
:여성 비행기 조정사도 있지 않아요.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근무를 잘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수도 대단히 많아 졌고요.
이렇게 고급인력에 모든 훈련을 받은 여군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이들이 군 생활을 마친 뒤에 다시 예비역으로 군인의 역할 수 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김 회장이 밝혔습니다.
김화강
: 군대생활을 마치고 군대생활을 그만두면 퇴역 이라고 해서 예비군 훈련을 받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수가 많은 여군 장병들을 사장시키면 안 된다 그래서 퇴역을 시키지 말고 예비역으로 활용하자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비역은 여성 본인이 원 할 때 할 수 있지만 여성들의 사정으로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그것을 물론 자율에 맡기는 거죠.
김화강
: 결혼을 해서 생활에서 여성이 없으면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전시에 여성을 차출 할 수 없죠. 그러니까 본인이 원할 경우에는 전시에도 재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이일은 여군들이 남성과 똑같이 전문 교육, 전문 훈련을 받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또 김화강 향군 여성회장은 만약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누구든 재 입대하는 일에 거침이 없다고 전하면서 이 역시 여성 군인들이 모든 훈련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김화강
: 당연히 우리가 다시 입대 해야죠. 우리가 재 입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행정 전투력이며 지금 각 병과에서 일하는 병과 분야별로 원래 위치에서 모두가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거죠.
예전에 여군 병과는 한정된 병과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어떤 한 분야에서 보조할 수 있었지만 지금 훈련받는 장명들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이와 함께 향군 여성 회는 여성들이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가정에서부터 자녀들에게 안보 교육을 바르게 시켜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전합니다.
김화강
: 6.25가 발발한지 올해 60년이 되는 해 인데 전국이 북한이 일으킨 전쟁으로 초토화된 땅에서 이제 경제적인 면에서 세계 10대안이 들지 않았어요? 결국은 안보가 든든해야 계속 발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안보를 튼튼히 하는 제 1선에서 가정에서부터 일터 그리고 사회로 확산시켜나가는 운동을 하는 거죠.
한편 해방 후 평양에서 공산주의 반대 운동을 하다 1947년 17살의 어린 어린나이로 평양감옥과 함흥 형무소를 거쳐 아오지 수용소 등을 차례로 겪다 6.25가 일어나기 직전 만기출소로 형무소를 나온 김영철 목사는 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에 합류해 6.25 격전지를 누비며 전쟁의 온갖 비참한 것을 모두 겪고 보았기에 지금도 6.25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요.
김영철 목사
: 당시 나는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2년 징역형을 받았는데 2년이 만기가 되어서 6.25전에 석방되어서 아오지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아마 나 밖에 없을 겁니다. 아오지에서 나와 고향인 평양에 왔다 후퇴하면서 미군에 합류했죠.
그는 이어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이 기획해서 벌인 전쟁인데 한국은 이 전쟁을 통해서 세계역사에도 없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며 이런 북한의 실체를 후세에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자신이 쓴 한국어로 출판된 전쟁관련 책 ‘나는 너를 믿는다’를 영문으로 곧 출판한다고 밝혔습니다.
김영철 목사
: 6.25전쟁이야 북한에서 다 준비해 먼저 침략을 하고 60년이 되도록 북침을 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을 북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소련도 공산주의를 하면서 한 번도 사과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그게 공산주의라고요. 이 책을 미국사람 특히 우리 2세,3세 들이 꼭 읽어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