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이달 초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 에서는 북한의 인권참상을 알리는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이 청문회는 캐나다 연방의회 하원 인권 소위원회에서 북한의 인권 개선을 촉구하기 위한 발의 안 채택을 앞두고 마련했는데요, 이날 청문회에 증언자로 나선 탈북자, 가명의 김혜숙 씨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을 그대로 밝혀 충격을 주었습니다. 김혜숙 씨는 청문회 증언 뒤 RFA 자유 아시아 방송과의 회견에서 청문회에서 못 다한 수용소 생활을 자세하게 전했습니다.
cut:다 영문 모르고 들어가요 들어가면 자기 죄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규정을 알려줘요. 그런데 그 규정을 어기고 반항하면 죽이고..
북한의 평범한 어린이였던 김혜숙은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18호 북창 관리소로 들어가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28년이라는 긴 세월을 북창 18호 수용소에서 보낸 김혜숙 씨, 그의 증언을 앞으로 세 번에 나누어 들어봅니다. 오늘 그 첫 번째 시간, 유년시절부터 꿈 많은 소녀 시절까지의 얘깁니다
cut: 북한에는 정치범 수용소가 여섯 군데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일성 사진 훼손, 한국 라디오 청취, 기독교 접촉, 탈북 약 15만 명의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긴 채 그곳에 갇힌 이유입니다. 기쁨도 즐거움도 전혀 없는 곳 다만 괴로움과 절망만이 있는 곳,
남한의 탈북자 단체 북한민주화 운동본부에서 제작한 북한정치범 수용소의 현주소입니다. 김혜숙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동생을 낳자 잠시 동안 친정에 혜숙을 맡겨 외할머니가 돌보았습니다.
cut: 우리 어머니가 평양 방직 공장에서 일했어요. 그래 동생도 낳았고 해서 당시 외할머니는 막내 이모하고 살았으니까 나 하나 길러주는 셈 치고 외할머니 집에서 유치원도 다니고 학교도 다녔어요.
그러다 1970년 10월 어머니 아버지가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김혜숙은 9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 아버지가 정치범 수용소로 실려 갔다는 얘기를 들어도 왜 갔는지 정치범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 몰랐습니다. 혜숙은 할머니 집에 남겨진 채 학교 다니며 공부했는데요, 할머니가 사는 구역 담당 안전 지도원은 혜숙이를 부모에게 보내라고 계속 재촉했습니다.
cut: 우리 가족이 사회지역도 아니고 관리소로 들어갔기 때문에 나를 그곳으로 보내야 한다며 보내라 보내라고 해서 그런데 그때 우리 외할머니가 나를 못 데려간다면서 5년을 끌었는데 이제 더 두지 말아야 한다면서 우리 고모가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수용소로 가면서 평양에서 살던 김혜숙의 일가친척은 모두 평양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고모도 남포로 쫓겨 갔지만 어린 조카를 부모에게 보내려고 평양으로 온 겁니다.
cut: 학용품과 신발 옷 등을 배낭에 넣어가지고 고무가 나를 데리고 가서 18호 처소라는 데를 가서 섰는데 철조망으로 다 둘러쳤더라고요
고모가 혜숙이의 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그 집 맏딸이라고 하자 관리인은 거기 두고 빨리 가라고 재촉합니다. 고모는 아버지 동생인데 어떻게 오빠와 올케언니를 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리나! 당시 13살 어린 나이에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네요.
cut: 고모는 그래도 우리 엄마를 자기 오빠의 부인이니까 한번 보았으면 했는데 끝내 돌려보냈어요. 처소 안전원들이 얼마나 악독한지 그것을 그대로 보낼 게 뭐에요. 나는 고모와 울면서 헤어져 시멘트로 된 방 컴컴한 곳에 앉아 있으라고 해서 몇 시간 있으니까 우리 어머니가 왔다면서 나를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김혜숙은 엄마와 마주했지만 어릴 때 헤어진 엄마의 모습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cut: 얼굴이 다 새까맣고 옷은 누더기 같은 것을 입고 그때 2월 말 인 데 신발도 다 꿰진 것 신고 그래 내가 야 이모 신던 신발이랑 더 가지고 왔을 것을...그런데 이런 정황인 줄 알았어야 뭐를 어떻게라도 하잖아요?
할머니와 이모와 함께 살 때 쓰던 옷가지 신발이라도 가지고 올 것을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부모가 설마 이런 곳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cut: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불러요 내가 못 알아보니까 울음도 안 나와요. 엄마 모습에 억이 막혀서 할머니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김혜숙은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엄마에게 한마디도 못 한 채 어머니 손에 이끌리어 온통 흙바닥에다 울툭불툭한 돌이 깔린 30리 길을 걸었습니다.
cut: 내가 그때 그 어린 마음에도 엄마를 보니까 너무 서러워 말 한마디 안 하고 30리 길을 걸어갔어요. 캄캄한데 등잔불 하나 새어나오고 그런 집들이더라고요. 우리 집은 긴 초가집이에요 집에 들어가니까 부엌문이 있고 방문이 있고 그게 다에요 그런데 부엌에도 천정도 안 했어요. 하늘이 다 내다보이는 그런 집에요.
어두컴컴한 방에 발을 들여 놓으니 그동안에 동생이 4명이나 됐고 친할머니는 연세보다 너무 많이 늙어 보여 다른 집에 잠시 온 온 느낌이었다고 혜숙은 기억합니다. 할머니가 구부정한 몸을 힘들게 일으켜서 손녀딸을 맞는 저녁상을 들여왔습니다.
cut; 나는 깜짝 놀랐어요. 그저 맨 풀에다 강냉이가루 약간 넣어서 죽처럼 했는데 죽에다 소금을 약간 넣었으니까 반찬이라 게 다른 것이 없어요. 작은아이들은 조그만 그릇에 퍼주고 큰 아이는 조금 큰 그릇에 퍼주고 그게 다에요.
김혜숙은 영문도 모르고 고모를 따라나서 수용소에 도착하니 배가 몹시 고팠지만 그 풀죽을 도저히 목으로 넘길 수 없었다고 합니다.
cut: 막 에리고 어떻게 말을 못 하겠어요. 울면서 안 먹고 있는데 동생들은 어느새 퍼먹고 내꺼만 처다 보고 있어요. 남은 것은 내꺼 밖에 없으니까 나는 안 먹고 숟가락을 놓고 있으니까 우리 어머니가 안 먹겠느냐고 해서 안 먹겠다고 하니 동생들을 나누어 주려고 하니까 할머니가 놔두었다가 다음 끼에 그것을 보태야지 한 끼라도 먹었으면 그만 자야지 하니까 아이들도 찍소리도 안 해요.
이런 데 익숙한 동생들이 아무 소리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애처로웠다고 김 씨는 당시를 돌아봅니다. 어렸을 때 헤어진 동생,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만난 동생들과의 첫 대면은 서먹서먹했습니다. 혜숙은 엄마 옆에 눕자 보이지 않는 아버지 소식을 가만히 물었습니다.
cut: 자리를 깔아주는데 이불도 다닥다닥 다 기운 것이더라고요. 그 옆에 엄마하고 같이 누워서 '엄마, 아버지는 안와' 했더니 '응, 야간작업 나갔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내일이 되어도 모래가 되어도 아버지는 안 오는 거예요.
아버지를 기다리며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아무 말도 없는 엄마에게 더 이상 물을 용기도 없었던 김혜숙은 아버지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일상은 그대로 흘러갑니다.
cut: 다음날 아침에도 그런 죽이고 점심은 아예 없어요. 그거마저도 점심은 안 먹고 저녁에는 아침보다 더 묽게...일 안 하고 자니까 한 3일째 되니까 그거라도 먹게 되더라고요 너무 굶으니까
어머니는 평양의 외할머니 집에서의 생활은 잊어버리고 이제 하루속히 관리소에서 풀죽 먹는 생활에 길들어야 한다고 한숨 섞인 소리로 타이릅니다. 관리소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어머니는 혜숙을 학교로 데리고 갔습니다.
cut: 단층 기억자로 된 학교인데 오전에는 인민반이 공부하고 오후에는 중학생이 공부하는데 그때 학교 들어가니까 내가 제일 살결이 멀끔하고 키가 제일 크더라고요 평양에 있을 때는 키가 중간쯤이었는데
학교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학교 시설은 그렇다 치고 내심 평양에 살 때 다니던 학교에서 배운 영어 공부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cut: 중학교 2학년 때 갔으니까 나는 영어 ONE, TWO, THREE 도 배우고 영어노래도 좀 배우고 그리고 평양에는 행사들이 많으니까 외국 노래도 배우고 그런데 거기 가니까 교원이 아예 없어요.
영어 교육은 차치하고 다른 공부도 제대로 배우는 것이 없는 학교생활, 오전 공부 마치자마자 중학생들도 모두 탄광 일에 동원됩니다.
cut: 중학생은 오후에 공부하기 때문에 오전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끌어다가 갱에다, 탄광에다 가져다주고 오후에는 공부하고 인민 학생은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에는 진흙을 파다 탄광에 갖다 줘요. 탄광에서 발파할 때 진흙을 쓰니까 학생이라도 딱 매여 있지 자유롭게 노는 시간이 근본 없어요.
학교도 가고 관리소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자 혜숙은 아버지가 왜 아직도 안 오시는지 너무 궁금해 할머니에게 묻습니다.
cut: 아버지 보위부에서 잡아갔데요. 왜 보위부에서 아버지를 잡아가나 했더니 모른다면서 다른데 나가서 절대로 아버지 잡아갔다는 소리도 하지 말고 왜 잡아갔는지도 물어보지 말아야지 여기서는 다 죽인다고 ...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들어도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어쩔 수가 없구나 하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고 김혜숙 씨는 고백합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에 바쁜 나날 속에서 혜숙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산으로 헤매며 식량에 보탤 나물 뜯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cut: 나는 학교 가는 길이라도 남의 아이들처럼 시퍼런 것만 보면 풀을 뜯어야 했는데 나는 평양에서 갓 왔으니 풀은 모르잖아요. 하지만 다른 애들이 뜯는 것 보면서 요만큼이라도 먹는 데는 보탬이 되니까 너무 풀을 뜯으니까 손이 시퍼레지면서 손이 꺼칠꺼칠해 지더라고요.
음악:
평안남도 북창군에 있는 18호 북창 수용소에서 28년간 생활했던 김혜숙 씨 그의 유년 시절로부터 중학교 때까지의 생활이었는데요, 다음 시간에 2번째 증언, 어머니마저 잃은 수용소의 소녀가장을 보내드립니다.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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