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탈북여성 가명의 김혜숙 씨는 한국을 비롯한 외국 여러 곳을 다니며 북한의 인권참상을 증언하고 직접 그림도 그려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8년간 정치범 수용소에서 갇혀 살았던 김 씨는 RFA 자유 아시아 방송과의 회견에서 수용소 생활을 자세하게 전했습니다.
여성시대 오늘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너무 쉽게 벌어지는 공개처형 그리고 북한에서 너무 쉽게 찍어내는 위조지폐에 대한 내용을 전합니다.
cut: 그 방에 들어가니까 돈이 착착 소리를 내면서 돈이 떨어지더군요. 돈을 찍더란 말이에요.
김혜숙 씨는 13살 때 부모가 먼저 끌려간 정치범 수용소 18호 북창 관리소로 들어가 탄광 일을 하면서 28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는 관리소에서 살 때 제일 기가 막힐 일은 너무도 쉽게 관리소의 인민들을 공개처형한 사실이라고 증언합니다.
cut: 대동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쪽은 제14호 개천수용소는 보위부 관리소고 우리는 보안성 (경찰 담당 수용소) 18호 관리소에요 그런데 우리는 식량사정이 너무 곤란하니까 청년들이 대동강 어느 곳이 얕은지 그런 데가 있다고 해요 거기로 건너 14호에 가서 강냉이 쌀 강냉이 가루가 많다고 해요, 훔쳐오는 겁니다.
이렇게 식량을 훔쳐오면 18호 관리소 집은 워낙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에 이웃이 무엇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어 평소보다 무언가 좀 낫게 먹는다거나 다르다 싶으면 담당 지도원에게 알립니다.
cut: 그렇게 먹다 걸리면 담당 지도원이 집에 와서 가택수색하면 강냉이 쌀, 강냉이 가루가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면 잡아다가 무조건 첫 자리로 쏴 죽이드만요. 14호에 건너갔던 거는
다음은 관리소 규정을 어기고 대들거나 반항하면 무조건 공개 처형이라는군요.
cut: 다 영문 모르고 거기에 들어와요. 그런데 들어가면 자기 죄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고 하면서 규정을 알려줘요. 그 규정을 어기고 대들며 반항하면 죽이고 그리고 97년 심화조사건 때 많이 들어와 처형당했어요.
심화조 사건은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권력기반을 재정비할 목적으로 저지른 살인극이라고 탈북자들은 전합니다. 1997년 심화조 사건 때 김일성 측의 북한 고위급 인사 2만 5천 여 명이 처형당했거나 유배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관리소에서 이들을 직접 보고 공개처형까지 목격한 김혜숙 씨의 얘깁니다.
cut: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이 정권을 쥐었는데 자기 측근 젊은 세대들을 몽땅 떨면서 김일성의 충신들은 몽땅 숙청했어요. 그러면서 숱한 간부들이 관리소에 다 들어오고 한꺼번에 많이 들어오니까 집집마다 동거를 시켰어요. 그때 우리 집에는 남포 시 와우덕에 행정위원회 위원장, 엄정도, 이 사람 네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평양시 중구역 안전부장 했었데요.
이 가족들이 모두 잡혀 들어와 당시 김혜숙 씨가 거처하던 곳에 함께 살다 보니 이들 역시 왜 수용소로 잡혀왔는지 영문을 모르더라는 겁니다.
cut: 이 사람들은 간부를 했었고 하니까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면 모두 다 쐈어요. 그때는 비공개로 쏘고 공개 공판도 97년부터 2000년도까지 제일 많았고요
공개 처형 때는 관리소 모든 사람이 공개 공판을 강제로 보도록 하는 야만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했다고 전합니다.
cut: 공시 몇 월 며칠 대동강에서 공개공판이 있습니다 하고 처형하는 것을 그렇게 알려줘요. 거기에는 무조건 다 참가해야 해요. 관리소에 있는 주민이 현재 밤교대거나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 외에는 그리고 분재 소에서 마을을 돌아봐요 그 때 참가하지 않으면 다 잡아가요 단련대로
김혜숙 씨는 이런 관리소 생활을 하면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탄광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일정 기간 갇힌 뒤 일반 사회로 나갈 수 있는 해제민이 됐습니다. 그때 비로소 북한의 인민이라는 공민증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cut: 공민증에 똑같이 평안남도 북창 군 봉창리 제18호 관리소 노동자 이렇게 박혀 있어요. 혈액형을 이주민은 까만색으로 표시했고 해제민은 빨간색이에요. 그것을 보고 이주민인지 해제민인지 알게 되죠.
김혜숙 씨는 혈액형 색이 빨간색으로 바뀌고 나서 안전부에 가니까 그때 비로소 친척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려줘 큰아버지 집을 찾아 갔다는 군요. 제일 먼저 알고 싶은 것이 자신의 가족들이 왜 관리소에서 살아야만 했는지 관리소에서는 물을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cut: 네가 왜 관리소에 들어가 살았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모르고 이렇게 30여 년간을 살았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월남했다는데 할머니를 원래 큰아버지가 모셔야 된데요 큰아버지는 산골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바람에 할머니가 너네는 따로 나라고 해서 분가해서 따로 살았대요. 그러다 우리 아버지가 군대 나갔다 오면서 할머니와 같이 살기시작해서 엄마와 결혼해서도 같이 살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관리소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부부인데 6.25 전쟁 때 남편이 월남했으니 할머니를 장본인으로 취급해서 할머니를 모시던 둘째 아들 가족이 관리소로 수용된 겁니다. 그런데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이 나갔다 돌아오지 않아서 월남한 사실을 몰랐다고 하네요.
cut; 얼마나 억울한 일이에요. 너무 억울하고 그렇지만 표현도 하지 못하잖아요 그것을 어디에 표현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우리가 28년 너머 살면서 물어보고 반항하면 쏴 죽이는 것을 본 것이 다인데...
큰아버지 집에 갔지만 그곳에서 김 씨네 가족이 자리 잡도록 도와줄 형편이 못돼 관리소에서 퇴거는 했지만 어디로 갈 곳이 없는 처지였죠.
cut: 아이들 둘 데리고 나왔는데 18호 관리소에서 퇴거를 떼어 가지고 나왔지만, 그 퇴거를 어디에 부칠 데가 없어요. 한국은 자기가 어디 가서 살고 싶으면 살고 그러는데 북한은 그게 아닙니다. 내가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겠다고 하면 거기서 퇴거를 떼어야 합니다. 그리고 청진이면 청진에 가서 거주를 부치고 살아야 하는데 나는 어디서 받아 주겠다는 데가 없어요.
김혜숙 씨는 이곳에서 우연히 18호 관리소에서 같이 있다가 김 씨보다 먼저 해제된 친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게 됩니다.
cut: 처음에 내가 서술 장사, 서술은 두부 만드는데 넣는 서술입니다. 콩을 갈아서 끓이다 서술을 넣어 고체로 만들었어요. 아주 무거워요 장마당 안에는 제자리를 사야 하잖아요. 그래서 길거리에서 여기서 팔다 쫓으면 저쪽으로 가서 팔고...
그러면서 돈을 조금씩 모았습니다. 하루는 장사하고 오는 길에 여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경리를 보는 한 여인이 자신의 집에 와서 보모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도 열심히 거들었습니다.
cut: 남편은 수출 피복 공장 초급당 비서고 아주머니는 여관 책임자 하면서 경리를 하니까 잘 살아요.
그런데 평양철도 학교에 다니는 그 집 맏아들이 방학 때 집에 오자 평양의 수재학교인 일거둥 중학교 선생님이 이 집 아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러 왔습니다.
cut: 저 건너 웃방에는 아무도 안 들어가고내가 하루에 한번만 청소하러 들어가요 그 남자가 교원이니까 교원들도 방학이죠. 그러니까 그틈에 와서 검퓨터를 그 아들에게 배워주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잉크가 쏟아 졌다며 아주머니 청소를 하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 방에 들어가니까 컴퓨터 프린터에서 5천 원짜리를 돈이 떨어지더라고요. 돈이 착착 나와요. 5천 원짜리요
가짜 돈을 찍어내는 것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거죠. 하루는 이 집 아주머니에게 나도 장사 좀 했으면 좋겠다며 의논조로 말을 했습니다. 평소 도량이 넓은 이 아주머니는 잠깐 있으라며 돈 찍어내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cut: 그 방에 들어가더니 돈을 이만큼 가지고 나와요 5천 원짜리를 그러면서 이것이 조금 진해졌는데 잘 써보라고 해서 색깔이 찍다 보니 조금 진해졌다는 말입니다. 가짜 돈인데도 누구도 몰라요. 그런데 돈을 어디 가서 쓰게 되면 숫자가 1234 그렇게 나가니까 안 되잖아요 그 때 돈이 120만 원 이었어요.
김혜숙 씨는 돈 120만원 가짜돈을 가지고 집으로 갈까 하다 이 가짜 돈을 진짜 돈으로 바꾸기 위해 그 집에 더 머물기로 했습니다.
cut: 그 집의 부식물이 떨어지거나 쌀이 떨어지거나 하면 돈을 주면서 사오라고 하는데 그때 여기서 준 가짜 돈을 가지고 물건 살 때마다 5천 원짜리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고 쌀 한 키로를 살 때도 5천 원 짜리 내고 거스름돈을 받고 이러면서 한 넉 달이 걸렸어요. 그 돈을 다 바꾸었어요.
이때 김혜숙 씨는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장사를하겠다며 그 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상치도 못했던 큰돈을 쥐었지만, 아이들이 머물던 남의 아파트가 하루 저녁에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나 사방팔방으로 아이들을 찾아다니다 결국 병이 들고 맙니다.
cut: 나는 시체를 보지 못했으니까 어디엔가 꼭 살아 있는 것만 같고 먼 데서 아이들이 지나가면 우리 아이인 것 같아 막 뛰어가서 보면 아니고 아이들을 찾아다니다 내 다리가 좌골 신경통으로 못쓰게 되었어요.
좌골 신경통으로 해서 걷지도 못한 김혜숙 씨는 오랫동안 사람 하나를 부쳐서 병원 다니며 침 맞고 교통비 숙식비로 돈을 모두 쓰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죠. 다리는 어느 정도 나아서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자 우연한 기회에 탈북 중개인을 만나게 됩니다.
cut: 이제 돈은 다 없어졌지 다리는 점점 낫지 그래 혼자니까 죽든지 살든지 내가 그 길을 택하겠다.
김혜숙 씨는 결국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입국해 지금은 북한의 수용소 실체와 수용소 이주민들의 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증언합니다. 김 씨는 자신이 있던 수용소의 약도와 수용소 생활을 그림으로 그려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김 씨는 자신이 그린 지도는 후에 나온 위성사진과 똑같다고 말합니다.
cut: 내가 관리소 약도를 그린 다음에 북창 관리소에 대한 지구위성이 나왔어요. 크게 나왔는데 산줄기랑 내가 그린 약도와 딱 맞았어요. 그래서 이것은 세계에다 공개해도 북한에서 꼼짝 못한다는 거죠.
18호 북창관리소 탄광에서 28년간 현대판 노예 생활을 했던 김혜숙 씨의 정치범 수용소 생활 증언,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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