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남한에서 5월은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들의 사랑을 되새기는 가정의 달로 보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등 행사도 많았는데요, 올해는 모두가 편안치 못한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북한의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갑자기 떠나보낸 가정의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이달에는 고향을 등지고 가족을 떠나온 탈북자들도 흩어진 가족을 그리는 마음을 더하게 했습니다.
김필순 : 모두 한 끼라도 같이 먹고 싶고 내가 해주는 한국 요리도 한 상에서 같이 먹었으면 ....
남한에서 두 번째 맞는 가정의 달이라는 탈북여성 김필순 씨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얘기인데요, 오순도순 밥상에 둘러앉은 정겨운 가족의 모습 생각만 해도 가정의 포근함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여성시대 오늘은 탈북자 장길수 씨네 가족의 그림 전시이야기 그리고 혼자 지내는 가명의 김필순 씨의 가정의 달의 의미를 전합니다.
남한은 물론 세계 여러 국가에 정착한 탈북자들 가운데는 가족들이 함께 온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혼자 왔습니다. 그중 장길수 군 가족은 네 가족 15명이 탈북 해 중국에 숨어 살다 2001년에 이들 모두가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이 가족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남한의 민간단체 탈북인권연대 문국환 대표는 중국에 숨어 살 때 이들을 도우며 장길수 군과 삼촌이 북한의 실상을 이 가족이 서울에 정착하자 북한인권의 참상을 그대로 표현한 장길수 군의 가족이 그린 그림들을 북한의 인권을 알리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든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 열었던 전시회는 얼마 안 돼 일반인들이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4월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북한 인권주간에 장씨네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는데요, 이를 계기로 앞으로 남한 전국에서 순회 전시회를 연다고 문 대표는 밝혔습니다.
문: 주로 5대 큰 도시를 중심으로 하지만 소도시에서도 1년 내내 순회를 하면서 오늘의 북한 현실 내지는 탈북자들의 고통을 그림과 일기를 통해서 알리는 일을 하려고 하는데 많이들 호응하고 있어요.
한국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그동안 장길수 가족의 그림을 북한의 실상을 담은 사진과 함께 전시했었 지만 이제는 장길수 군 가족이 그린 원화와 일기를 전시한다는데요,
문: 쫓겨 다니며 그림을 그렸고 쫓겨 다니며 숨 막히는 생활 가운데 일기를 썼기에 이 가족을 통해서 북한의 실상이나 탈북자들의 고통 어려움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아울러 이 가족들이 중국에서 숨어 살며 썼던 잡동사니 일용용품도 전시해 이들이 생사를 걸며 마음 졸였던 중국 생활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합니다.
문: 중국에서 1원 짜리 버스표나 전철 표하나 버리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중국 생활할 때 관련된 종잇조각 하나 버리지 않은 것을 보고 인간 생명에 대한 귀한 것을 볼 수 있어요.
장길수 가족이 그린 그림은 약 300여 점에 이르는데요, 서울에서 열렸던 북한인권 주간에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100여 점의 그림을 전시했습니다. 문 대표는 이제 앞으로는 전국의 도시를 돌며 전시하는 그림들은 그동안 전시되지 않았던 원화들이라며 사진과는 달리 그림으로 보는 북한의 실상이 살아있는 느낌으로 전해질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문: 사진들은 그동안 언론을 통해서도 많이 소개되었고 사진은 정보가 북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한정된 것이라 많은 분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보지 못한 장길수 가족의 원화는 일반인에게 공개를 못 했어요.
특히 북한 주민들의 식량난을 그림에서 그대로 느끼게 되는 장길 수 소년의 모습은 언제 봐도 충격적이라며 주민들의 굶주림 현상이 이 그림 한 장으로 사실적으로 표현돼 북한의 실상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는군요.
문: 장길수 소년이 그린 쥐를 먹는 장면이 있어요. 그 그림이 최초로 국제사회에 알려진 것이 미국의 뉴스위크지에 실렸었죠. 쥐를 먹고 한 손에는 뱀을 쥐고 있는 원화인데 외신에서 단 제목이 러키 맨, 운 좋은 남자였어요. 다들 굶주리고 있는데 이 소년은 뱀이나 쥐라도 먹고 있으니 다행이다 하고 해서 러키 맨 이라고 했어요.
특히 어린 눈으로 본 공개처형 장면과 여성들의 고통이 가중되는 북한의 현실이 그림에 고스란히 녹아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픔이 그대로 전달된다고 문 대표는 설명합니다.
문: 가족이 공개처형하는 장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어요. 시리즈, 연속으로 15 작품이 되는데 이런 것을 보고 북한현실에 가슴 아파하고 또 팔려가는 모습 북한을 탈출했다가 강제 송환되는 장면을 그린그림, 여성을 소재로 한 것이 많아요.
특히 19살 처녀의 모습이라는 제목의 굶주리고 헐벗을 모습의 그림을 보고 문 대표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북한을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이 그림의 영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문: 그 그림은 길수 외삼촌이 그린 그림이에요. 생기를 잃은 19살 처녀의 모습, 이라는 제목입니다. 길수 외삼촌이 그린 헐벗은 소녀의 모습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장길수 가족의 그림은 이렇게 그들이 체험한 북한의 현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데요, 어린 시절에 길수군의 눈에 비친 북한 군인들을 소재로 한 그림은 탈북한 북한군의 증언과 일치한다며 놀라워했어요. 북한군 고위층에 있던 탈북자가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를 증언하는데 이 증언 내용을 그대로 길수 소년이 옮겨 놓은 것 같았다고 얘기합니다.
문: 군인들이 민가에 침입해서 소중하게 키우던 닭, 염소 돼지를 잡아간다든지 민가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내 간다는 것을 많이 그렸어요. 군부대 근처에서 살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 군인들이 너무 배가 고프니까 민가에 침입해서 강도로 변하는 모습을 많이 남겼죠.
이외에도 중국에 숨어 살 때 자유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그림은 은신처에서의 힘든 과정을 그대로 표현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소개합니다.
문: 공안에 은신처에 수색을 나오자 서로 숨는 과정을 그린 그림, 또 새들을 은신처에서 날려 보내는데 새처럼 날아가고 싶은 소망을 담은 그림, 현실적으로 경험한 내용을 그린 그림입니다.
장길수 가족의 그림은 북한의 비참하고 암울한 현실을 그리고 있는데 그 색감은 대조적으로 모두 화려합니다.
문: 당시 길수 군이 중국에서 크레용 크레파스를 처음으로 쥐어봤고 중국에서 그렸지만, 중국제 크레파스가 아닌 한국에서 가져간 겁니다. 스케치 북도 그러니 너무 신기해했어요. 그래서 아주 색감이 화려합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 보면 묘한 슬픔이 더 묻어난다고도 하고
문국환 대표는 1996년에 중국에 사업차 갔다가 연길에 숨어 지내던 20대 청년 장길수 군을 만나게 되자 차마 그대로 발길을 돌릴 수 없어 은신처를 마련해 주면서 돕기 시작했죠. 장길수 군 가족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북한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런 북한의 인권실상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미치자 그림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장길수 씨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문 대표는 전합니다.
문: 화가의 소질이 충분한데 당시의 그 고통스러운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이 어려운가 봐요 여러 사람이 왜 그림을 계속하지 않느냐고 전혀 다른 공부를 하느냐고 하면 말을 굉장히 아끼더라고요 그러니까 아픈 고통의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겠죠.
북한에 기족을 그대로 두고 남한에 혼자 정착한 탈북자 김필순 씨, 직장생활을 하면서 북한의 가족을 돕고 있습니다. 자신은 힘든 일을 하지만 가족이기에 힘이 닿는 한 계속 돕고 싶다고 하는데요,
김: 북한에다 한국 돈 100만 원 보냈어요. 우리 집에서는 그것으로 옷도 사고 물건을 샀데요. 한국 돈 100만 원이면 중국 돈 5,700원 됩니다.
2008년 동남아를 거쳐 남한으로 들어간 가명의 김필순 씨는 이제 좀 자리를 잡아 북한 가족들을 더 많이 돕고 싶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고 얘기합니다. 가족들에게만 이라도 자신이 보내는 전액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김: 30%는 뜯기고 70% 70만 원을 보냈어요. 그래 화폐 교환 뒤 어떻게 되었느냐니까 돈 있는 사람이 힘들었고 돈 있는 사람은 크게 피해를 보지는 않았고 돈 있는 사람이 망했다고 전해주더라고요.
이정도 액수로는 돈을 몇 번만 잘 굴리면 장사를 할 수 있지만 당장 먹고 사는데 쓰기 때문에 한 반년 정도 쓸 수 있다며 정기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연락이 옵니다.
김: 8개월에 한 번씩 오거든요. 전화도 처음에 하던 집에서는 안 되어서 동생의 집으로 이동해서 잠깐잠깐 하는데 전화 탐지기가 통화하는 말을 정확하게 탐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가 어느 쪽에서 오는지 오는데서 잡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화를 주고받는 길도 요령이 생긴다고 하는데요,
김: 산에서 전화를 2분 내지 5분 정도 잠깐 껐다가 다시 하는 선도 있고 다른 곳에서는 또 보위부를 끼고 집에서 전화를 편안하게 하는 집도 있다고 들었어요.
각종 텔레비전에서 가정의 달을 맞아 온 가족이 놀러 가는 소식, 어버이날 부모와 함께 지내는 장면 등 행사소식을 전할 때면 북한 가족들의 모습을 애써 지운다고 합니다.
한국이 5월 가정의 달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가족이 너무 보고 싶고 집에서 노는 날 휴식하는 날 그때는 가족 생각 고향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래도 자신은 다른 탈북자들보다 좀 다른 점이 남한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끔 만나지만 그래도 친척들의 만남이 큰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김: 우리 고모 언니도 제 사정을 다 아니까 전화로 오고 가고 해요 다른 사람들 보다 그래도 여기 친척이 있어서 많이 힘이 됩니다.
가정의 달을 지낸 탈북가족들의 얘기를 전해 드렸는데요,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