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한국전쟁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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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서나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제일 고통을 받는 계층은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여성입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에서 많은 어린이들이 고아로, 여성들은 모든 가족을 책임지고 가정 밖으로 내몰려 힘겨운 삶의 짐을 떠맡고 있습니다. 6.25전쟁 60주년 특집 여성시대, 오늘은 한국전쟁이 당시의 일반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봅니다.

함 교수: 여성들은 사실 좌익이나 우익의 이념 속에서 아주 많은 희생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제가 보는 관점입니다.

김영순 (탈북자) : 50년 11월 3일 다 중국으로 조직적인 후퇴를 했어요. 간부가족들만, 일반인민들은 다 북한에서 전쟁을 겪고

남한의 일반여성들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이 혹독한 전쟁 경험이 있는데 반해, 탈북자 김영순 씨는 6.25 당시 중학생으로 간부자녀 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안전하게 지내다 정전 후 평양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합니다.

김: 정전 직후 중국에서 조직적인 귀국을 했거든요 중국에서 1 열차 2 열차 3 열차로 나왔어요. 저희는 11열차로 마지막 열차로 나왔거든요. 11월에, 그래서 평양에 나오니까 피난민 구제소라 는 것이 있어요. 우리는 오빠가 전사해 사망통지서 받고 그다음에 보위 성에서 유가족으로 대우해 주더라고요. 그리고 김일성이 거주하던 특구에서 있었어요. 우리 가족은 별로 고통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인민의 천국이라고 선전하던 북한은 치열한 이념 갈등으로 민족 간의 총부리를 겨누고 피 흘리는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간부가족이 아닌 일반 인민들을 열외로 취급한 것입니다.

다시 남측 얘기로 돌아가죠. 여성주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이 여성의 삶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전북대학교 고고 문화 인류학 함한희 교수는 한국전 당시 여성들은 자신의 뜻과는 다른 이념, 남성중심의 가족주의, 그리고 성이라는 세 부분의 영역에서 저항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함 교수는 그동안 전쟁에 관한 여러 보고서에서 미망인 문제나 남성들이 전쟁에 끌려갔을 때 혼자 남아 경제활동을 한 여성들의 얘기, 지리적으로는 서울지역이나 삼팔선 가까운 지역의 논문들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함 교수는 전북 임실 지역의 여성 전쟁피해자 현황을 직접 조사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요, 이 지역은 전쟁 당시 좌익과 우익 활동이 치열한 곳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cut: 임실지역이 갖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빨치산, 지방 좌익의 활동이 아주 활발했던 지역입니다. 내전의 형태를 띤 만큼 아주 치열했던 전쟁지역에서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던 여성들에게 어떤 일 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얘기죠.

빨치산은 비정규병, 유격대원, 노동자, 시민, 농민 등으로 조직돼 단독이나 소부대의 행동으로 적을 기습하고 재빨리 퇴각하는 활동을 했죠. 빨치산은 6.25 전쟁 후에도 지리산을 비롯한 남부지방 산에서 전쟁과 이념의 대결을 격렬하게 벌였는데요, 이 지방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좌익과 우익의 이념문제가 여성에게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함 교수는 지적했습니다.

cut: 인구 거의 반반이 나뉘어서 반은 우익에 반은 좌익에 그래서 6.25가 나고 7월쯤에는 여기가 인민공화국 시절을 맞게 되죠. 당시 이념전쟁 때문에 인민공화국 치하에서는 우익이 다 죽고 그다음에 9.28 수복이 되어서 10월경 국군들이 들어 왔을 때 좌익이 피해를 많이 보게 되는 그런 와중에 여성들은 대단히 많은 희생을 당했어요.

당시 일반 여성들 특히 자녀를 키우며 살림을 하던 농촌 지역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우익, 좌익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남편이나 남자 형제들, 시아버지 등 남성 가족에 따라 여성들의 성향이 결정되었기에 희생이 더 컸다고 전합니다.

함: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과 상관없이 너는 우익가족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기 가족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 했습니다.

함 교수는 여성피해자를 여러 명 만났는데요, 올해 80이 넘은 한 할머니는 시댁은 우익, 친정은 좌익으로 당시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젊은 새댁이었던 겁니다.

cut: 시댁은 시집식구들이 좌익 빨치산에 의해 모두 총살을 당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기를 낳으러 친정에 간 사이에 살아남게 된 할머니의 얘기인데, 할머니가 목숨은 건졌지만, 또 친정은 좌익에 동조했다고 해서 우익에서 이 가족들을 잡아가 죽을 위기에서 살아납니다. 혼자 살아나와 시댁으로 돌아왔지만, 시댁식구들도 다 빨치산에 죽임을 당했고 그래서 그 전쟁 때의 피해가 몇 십 년간 지속하고 있는 김 할머니의 사례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이 택할 수 있었던 길은 가족에 대한 새로운 책임, 오로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아이들에게 온 삶을 헌신했다는 거죠. 할머니는 80이 넘었지만, 아직도 전쟁의 참상이 너무도 생생하게 가슴속에 묻혀 있어 지금까지도 그 사실을 자녀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군요.

함 교수 : 동네 몇 사람만이 그런 얘기를 알고 있었지, 대부분이 다른 동리 사람들도 몰랐고 아들도 아직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며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얘기를 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고 얘기를 해 주셨어요.

함 교수는 여성들은 전쟁에서 부계 친족가족, 그러니까 남성 중심의 가족하에서 시집살이를 할 때였기에 자신의 결정권은 절대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던 시절로 또 다른 할머니의 사례를 전했습니다.

함 교수: 남편이 죽고 시댁 식구들이 그 며느리에게 너 때문에 살기 힘들다며 쫓아낸 실제 사례도 있었고 그래서 가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그로 인해 여성들에게 강한 힘을 자립할 수 있는, 또 경제적인 활동의 필요성 등 의식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외국의 다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성들이 경제 활동을 하며 여성의 지위가 올라간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고 함 교수는 밝혔습니다. 한국은 어떤지,

함 : 우리나라 전쟁에서 저는 여성의 지위가 올라간 것까지는 확인하거나 증명하기는 힘들어도 여성들에게 새로운 힘을 부여할 수 있었던 계기라고 봅니다.

이 보고서 에서는 성폭력도 다루었는데요, 전쟁에서 아군이나 적군의 가장 큰 성폭력 피해자는 여성들이었고 이 문제는 문학 작품이나 영화 등에서도 많이 다룬 부분의 하나입니다. 당시 역시 임실에서도 좌익이나 우익이 마을을 점령했을 때 성폭력을 하나의 무기로 썼다고 함 교수는 피해자 사례를 통해 증언합니다.

함 교수: 한 할머니는 남편이 당시 그 마을의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인민공화국이 된 상황이었으니까 그 마을에서 피했죠. 그 마을에 좌익 지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 여성을 겁탈하고 자기부인으로 삼아서 포악질, 몹시 나쁜 짓들을 많이 했다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하면, 좌익, 빨치산을 소탕한다는 미명하에 우익들이 동네 여자들에게 너희 남편 또는 너희들이 빨치산들 돕고 동조하지 않았냐 하지만 나한테 잘 보이면 그런 것을 무마시켜 주겠다고 해서 많은 여성을 겁탈한 사건도 있었어요.

이런 사례의 증언은 아직도 남아 있는 피해여성들로부터 직접들을 수는 없다고 함 교수는 얘기합니다. 당사자들이 아닌 당시 마을에서 일어났던 그 일을 목격했던 할아버지들로부터 들으면서 당시 여성들은 그런 일 후에 쫓겨난 사람도 있었고 아니면 그 일을 그냥 덮어두고 산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에서 이념 때문에 죽음에 선 여성들의 상황은 북한도 특정 간부나 그들의 가족이 아닌 일반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지난해 정당을 창립한 남한의 통일 인당 정수반 부총재는 전합니다. 정수반 씨는 지난 2000년 10월 남한에 입국해 통일문예인협회 회장을 지냈고 탈북자들도 남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통일 인당을 창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수반 씨는 특히 북한의 숙청대상에는 온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이 또한 여성들이 이념전쟁에서 많이 희생된 사례로 지적합니다.

정: 북한에서는 정의의 조국해방전쟁, 이라고 하는데 양쪽을 다 살아 봐서요. 민족 동족끼리 피 흘리고 피 터지게 싸운 거 아닙니까? 민족의 비극이죠. 북한군이 밀리면서 남쪽에서도 사람을 많이 죽였지만, 북한군 자체가 북한에서도 많이 죽였거든요, 또 자기네들 끼리 숙청을 했으니까요.

북측은 전쟁에서 그리고 뒤이은 숙청과정에서 숙청 대상자 가족의 일원인 여성들 역시 모두가 이념의 대결에서 희생된 것이라는 얘기죠.

정: 북한은 뿌리를 뽑는 나라니까 가족들 모두 같이 잡아가고 같이 죽이고 정치범 수용소에도 끌려간 사람들, 그래서 다 가족이 같이 가지 않아요. 참담하죠.

숙청, 그 측근에서 숙청 사실을 직접 보고 들은 김영순 씨의 말입니다.

김: 남로당원들이 전쟁 시기에 종파로 다 숙청했어요. 조일명, 박헌영, 이승엽 이런 일당을 타도하자고 해서 다 숙청했어요. 박헌영은 부 수상했잖아요. 가족들은 다 산간오지로 실어가고 정치범이 다 되어서 영원히 매몰 됐어요.

김영순 씨는 조선인민군 협주단 배우 출신의 탈북자인데요, 김정일의 첫 부인 성혜림의 친구로 김일성 가계를 잘 안다는 이유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10년 가까이 갇혀 지내다 출소한 뒤 탈북했습니다.

한국전쟁은 정전상태로 60년이 흐르는 동안 전쟁 상황에서 일어났던 비극의 여성들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 미술, 영화, 드라마 등이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영화 등에서는 여성의 순수한 인간적인 모습, 또 내면의 갈등, 전쟁 중에서의 사랑 등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런 예술 작품을 표출하는 상황이 전쟁 당시 그대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며 한국에 와서야 이러한 작품을 대할 수 있었다고 정수반 씨는 말합니다.

정: 휴먼스토리, 사람이야기 같은 것은 없고요, 북한에서는 체제선전하고 북한군이 다 이기는 내용으로 가는 거죠. 이런 것은 체제가 용납을 안 하죠.

김 영순 씨도 북한에서 전쟁을 다룬 영화들이 많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인민들을 세뇌 시키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전합니다.

김 : 여성을 주제로 한 전시 간호 장에 대한 간호 장의 딸 도 있어요. 전시에 여자 영웅들도 많아요. 그래서 전시에 이런 것을 굉장히 많이 장려했고, 당국은 당과 수령을 위해 내 한목숨 바치는 것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북한 인민들의 스토리를 엄청 많이 취급했죠. 세뇌의 중요한 고리니까.

한반도에서 다시 한 번 한국전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지금의 여성들은 어떻게 대처하며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 함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함 교수: 굉장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요. 당시에는 우리가 너무 가난했고 여러 가지로 한국이 처했던 상황과 지금 하고는 많이 다르죠. 여성의 자의식이라든가 여성관련 문제들이 많이 발달했고 해서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 앞으로 계속 관심을 두고 조사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여성의 특별한 창조성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한국 여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분야라고 함 교수는 설명합니다.

함: 여성들이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남성보다 월등 뛰어나기 때문에 어떤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지난번 IMF 위기, 경제상황 위기 때 여성들이 모두 장롱 속에 넣어둔 금을 꺼내 모으지 않았어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꺼내는 거거든요. 여성의 힘이 한국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따라서 60년 전 6.25전쟁에서 나타난 외적인 가족으로부터의 피해, 성으로부터의 피해, 이념으로부터의 피해 등 이런 현상이 똑같이 되풀이 되지는 않을 것 이라고 강조합니다.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