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음악의 자유 찾은 탈북자 김성란 씨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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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북한에서 음악의 자유를 찾아 탈출한 가수, 지금 대구 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반인 김성란 씨는 여러 분야의 음악을 다양하게 배우고 체험하면서 하루하루를 새롭게 보낸다고 말합니다.

김성란: 내가 그렇게 갈망했던 음악을 이 자유 세상에 와서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다 습득해서 공부하니까 나만이 감추고 있던 '끼'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어요.

실용음악은 우리가 생활하면서 실용적으로 쓰이는 음악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고전음악, 클래식이 아닌 모든 대중음악이 실용음악입니다. 이제는 대중음악도 이론과 실기를 겸비해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실용음악과가 한국에는 웬만한 대학에는 다 있습니다. 이 대학을 가기 위해 다니는 학원도 많고 실용음악과에 지원하는 학생들도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여성시대, 이 시간에는 탈북 음대생 김성란 씨의 북한에서의 음악생활, 그리고 음악의 자유를 찾은 남한에서의 음악 생활을 전해 드립니다.

북한의 함북 예술단 가수로 활동했던 김성란 씨는 예술단 가수로도 뽑혔지만, 배우를 모집하는데도 뽑혀 한때는 꿈에 부풀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대학도 포기했다고 당시 상황을 얘기합니다.

김성란: 북한에서는 지목해서 뽑히는 겁니다. 학교에서부터 음악을 할 수 있거나 하면 예술단에서도 뽑으러 옵니다. 배우 모집이나 예술단 음악 하는 계열에서도 와요. 한번은 배우모집에서도 뽑혔는데 부모님께서 여자는 시집 잘 가야한다 무슨 음악이냐고 엄청 못하게 했어요. 예술단에는 성악으로 지원받아 대학에 오라고 초청받았는데 못 갔습니다. 음악을 절대로 뒷받침 못해준다고 북한도 앞면 뒷면 빽이 다 있어요.

북한에서는 재능이 있어도 뇌물을 주어야 예술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김성란 씨는 인민군대에서 활동하는 북한 인민군 협주 단에도 뽑혔지만 여기서도 좌절하게 됩니다.

김성란 : 조선 인민군 협주 단이라고 군 악단이라고 있는데요, 시험을 보아서 합격했는데 돈을 달라 하고 물질을 달라하고 그런데 부모님은 음악을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서는 못한다고 해서 갈등이 심했어요.

김성란 씨는 함북 예술단에서 가수로 활동하면서 틀에 짜인 노래만 부르는데 답답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노래하면 감정의 희로애락 등 모든 것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개인적인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절제를 강요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음악에 대한 갈망으로 결국 북한을 탈출해 2004년에 한국으로 왔습니다. 남한에 와 보고서야 음악 세계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군요.

김성란: 북한은 단순하거든요. 모든 음악은 틀 안에서만 단순하게 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문화는 자유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야! 자유로운 문화, 한국에 와보니 문화는 아무 문화나 정말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교육을 받으니까 이 공부를 너무 잘했구나...

그러나 성란 씨도 한국에 도착한 후에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한 때는 실망과 좌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김성란: 처음에는 우울증에 시달리고 문화가 다르고 해서 많이 시달렸어요.

또 노래한다니까 주변의 소개로 여러 작곡가를 만나 트로트, 즉 성인가요를 배우게 됩니다. 당시 김 성란 씨는 한국에서는 트로트가 제일가는 음악으로 착각할 정도로 주변에서 이런 종류의 노래를 권했다고 해서 음반까지 낼 계획이었습니다.

김성란 : 트로트를 배웠어요. 처음에는 트로트 뽕짝이라는 것을 잘 몰랐어요. 그래서 한국에는 트로트 음악이 최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트로트를 불러서 히트 한다고 난리 쳤어요. 그래서 사랑도둑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주더라고요. (노래) 도둑이야, 도둑이야 사랑 좀 잡아 주세요, 이 노래를 인터넷에 올리면 뜬다는 말에 있는 돈 없는 돈 들여서 한동안 고통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다행스럽게 한국에서 음악을 하는 양 아버지를 만나 김성란 씨가 한국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자신이 설 자리를 스스로 알게 돼 희망과 꿈을 갖는 계기가 됩니다.

김성란: 양 아버님이 작곡가라 원래 클래식 음악 작곡가시고 세미클래식 차 한 잔 마실 때 노래를 했어요. 양 아버지가 복음성가도 많이 쓰셨고요 아버지가 쓰신 복음 성가를 부르면서 자신의 생각으로 찬양하는 것과 영혼으로 찬양하는 것이 의미가 다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한국에서 믿게 된 기독교 신앙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음악을 하는 양아버지의 소개로 대구예술 대학의 실용음악과에 입학했는데요, 너무 다양한 음악분야에 놀랐다는데요, 처음에 한국가요 트로트를 부를 때와는 달리 한국의 가요도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부르는 것을 보고 감탄을 한 거죠. 다시 김성란 씨의 얘기 들어보죠.

김성란: 우리가 생각했던 한국의 가요를 무시 못 하겠더라고요. 그 안에는 느리고 또 절제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몰랐구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물 안에 있는 음악만 선호하면서 마음대로 표현도 못 하게 해서 그것이 제일 서러웠던 거죠. 처음에 가요로 노사연의 만남을 참 좋아했어요. 감동도 많이 받고... 노래: 만남, 한 구절

낯선 실용음악과를 택하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재능이 있고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도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탈북자들이 다 고생하는 영어도 문제였습니다.

김성란: 북한에서 영어를 안 쓰기 때문에 거기부터 어려웠어요. 또 북한에서 배웠던 음악성이나 이것을 가지고는 너무 많이 모자라겠구나, 제가 재즈 하면서 팝송을 합니다. 저의 전공 교수님은 미국에서 스윙 쪽 재즈를 공부하셔서 지도받고 있습니다.

흑인들 특유의 독특한 음악성의 재즈는 미국의 전통음악으로 분류된 음악입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미국의 뉴올리언TM에서 시작된 서양음악이죠. 스윙은 흥겨운 댄스 춤곡으로 1930년대 빅 밴드가 연주했던 스윙이라는 음악이 크게 유행하면서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김성란 씨는 북한에 있을 때도 외국인들을 통해 재즈 음악을 들어봤는데 이 리듬이 방문한 외국인, 즉 그 나라의 문화로 알았다는 겁니다.

김성란: 김일성, 김정일 생일에 쿠바 사람을 비롯한 미국과 한국사람 빼고는 다 와요. 56개국의 민족들이요. 그래서 재즈 리듬은 많이 들어 봤어도 그 나라의 문화라는 것만 알았죠. 여기 와서 재즈를 들어보니 어디서 듣던 음악인데 그전에는 우리와는 아주 무관한 음악이라고 생각했기에 처음에는 아주 힘들었습니다. 1, 2년 공부하면서 그런 음악을 계속 듣다 보니 3학년이 되니까 습득하게 되더라고요.

학교생활에서 아주 낯선 분야의 음악을 택한 데다 한국 학생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또 학교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는지 궁금했는데요,

김성란: 없었습니다. 아 너무 좋았고 재미있고요, 교수들이 참 잘 가르치시고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잘 지내주고 하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이제 졸업을 앞두고 논문준비에 한창입니다. 어떤 주제인지요?

김성란: 실용음악은 다양한 것이니까 세미클래식 팝, 재즈 스윙, 보사노바에 어떻게 소리로서 감정과 트레닝, 훈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발성과 호흡에 관해서는 어떻게 부르나 절제와 감정 모든 느낌을 잘 조화하는 것을 논문에도 쓰고 있어요.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 가서 실용음악을 더 공부하고 싶답니다. 그래서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김성란: 보컬, 노래로서 다양한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가요면 가요 그리고 민요도 이런 노래를 잘 배워서 가르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김성란 씨는 이번 여름방학에 레크리에이션, 즉 오락 훈련도 받았다고 하는데요, 레크리에이션은 일로 피곤해진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자유시간을 활용해서 즐기는 여가 활동입니다. 여행, 야유회, 체육대회, 노래 부르기 등 다양하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통해 훈련을 받고 또 레크리에이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김성란: 레크리에이션은 치매 환자로 치료할 수 있고 우울증이 심한 사람도 치료를 한다고 해서 교양과목에서 공부 했어요 배우 다 보니 항상 즐겁고 남에게 웃음을 주고 그것이 너무 좋아 그래서 이번에 알찬교육을 받고 왔어요.

성란 씨는 이번 레크리에이션을 공부하면서 정말 많을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이런 여가 활동을 통해 마음이 하나가 되고 단합하는 계기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강조합니다. 북한에서 얘기하는 단합과 너무 달랐다고 하네요.

김성란: 이 레크리에이션 공부하면서 우리가 생각했던 단합, 자유의 단합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김성란 씨가 한국에 와서 또 한 가지 잘한 일은 하나님을 믿은 사실입니다. 물론 노래를 하면서 우선순위가 복음성가, 찬양이라고 하는데요,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보니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비롯해 북한 주민에게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찬양을 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성란: 한국에 와서 성경공부를 하다 깜짝 놀란 일도 많고 하나님이 북한도 사랑하셨는데 인간이 중심이 되다 보니 마지막에는 백성들이 쓰러져 가는 소리도 못 듣고 이렇게 탈북자들이 튀어나오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셔서 알게 해 주시고 그 과정 과정이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동안 김성란 씨는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활동도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김성란: 여기에 넘어와서 세종문화회관에서도 공연했고 지금 찬양 집회도 다니고 음반은 저작권협회는 다 등록이 되어 있는데 음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찬양 부를 때만큼 행복한 것이 없어요.

노래: 복음성가

김성란 씨가 부른 성가 들으면서 여성시대 마칩니다. RFA 이원흽니다.